알코올 중독 아내의 이야기 - 한 생명이 자라는 일 -

*라파마을은 유정란 외에도 구찌뽕이 있습니다. 제법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라 잡초를 베어주기 위해가보니 4-5년 전 목사님께서 둔덕 꼭대기에 위치한 곳에 나무를 심으신 것이 작년에 이어 올 해도 무성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초록빛 작은 알맹이들은 올 여름을 지나면 벌겋고 커다란 열매가 되겠지요. 자란다는 것은무수히 많은 세월을 지나고, 많은 것들을 먹은 후에야 빛을 봅니다. 올곧게 자기 자리에서 자라는 구찌뽕과달리 가느다란 줄기가 언제 손을 뻗었는지 칭칭 감겨 올라 제 열매만으로도 힘들 구찌뽕 나무 줄기를 꽉 움켜쥐고 자라는 칡은 제거의 대상입니다. 자기가 자랄 자리를 벗어나 다른 것에 기대어 자라는 것은 서로를 병들게 하기에 잘라내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내가 자랄 자리를 잘 지켜 자라고 있는지, 혹은 다른 것을 움키고 기대어 자라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얼마 전 자그마한 병아리들이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식구 된 병아리들이 온 종일 삐악이며 라파마을 작은공간에 들어와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을 건이, 단이가 지나치지 못하고 앞을 맴돌다 한 마리씩 품에 안겨주신목사님 손길에 함박웃음으로 기뻐하며 집에서 키우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데려왔습니다. 옷을 말아올려 병아리를 넣고있기에 슬쩍 들여다보니 아주 작은 노란 솜뭉치가 빼악거리고 있었습니다. 상자에 흙을 넣고 물과 밥을 넣어준 후 병아리 두 마리를 옮겨주니 구석에 둘이 뭉쳐 자리를 잡았습니다. 두 마리나 되니 이름도지어주자고 말했더니 건이가 치즈 색 같다며 치즈인데, 털이 보송하니 ‘보송보송 치즈 보송’이라고 지어주자고 말하여 조금 긴 듯했으나 그렇게 불러주기로 했습니다. 단이는 고민할 새도 없이 곁눈질로 형을 보더니‘보송보송’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안고 다니며 기르던 건이 단이와 달리 저희 부부는 일주일 후에 오실 부모님 맞이와 공동체 일정, 홈스쿨 수업 준비로 분주히 보내다 상자에 넣어둔 병아리에게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고, 그 사이 온도를 유지할 램프가 없자 물그릇에 빠졌다 나온 병아리가 털이 마르지 않은 채로 반 나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와 들여다보니 오전만 해도 괜찮았던 병아리가 어디가 많이 아픈지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순간 아차 싶어 헤어드라이기로 젖은 털을 말려주고, 안아주고, 입을 벌릴 때 물과 밥을 넣어주었으나 제대로 먹지 못했고 그 순간만 해도 원인이 램프라고는 생각도 못해 그저 안타깝게 발을 동동이며 다시 제 집에 넣었다 안았다를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건이, 단이는아직까지 상황이 심각한줄 모르고 그저 병아리가 좋다며 들여다보기만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본 병아리는 상황이 더 안좋아져 있었습니다. 서 있기는 커녕 누워서 몸을 뒹굴다 시피 슬쩍움직이기만 하기에 이불을 깔아주었고, 아침 밥을 앉히고 들어와보니 울음소리가 한 마리만 들려 아픈 병아리를 들어올려보니 더는 눈을 뜨지 않고 울지도 않는 모습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건이에게 이 사실을 말한 후 너무 미안한 마음에 병아리를 제 손에 올려 입가에 대고 부비며 눈물을 흘리자 덩달아 건이도 울기 시작했습니다. 건이와 함께 마당에 우리 집을 거쳐간 곤충이 묻혀있는 땅을 파고 병아리를 묻어준 후 돌맹이로 표시를 해두고 꽃 한 송이를 올려 잘 가라고 인사를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마무리 되어 이번에는 남은한 마리 잘 길러보자 말하고 유치원에 보냈는데 아이들이 돌아올 즈음 집 안에서 삐악 소리가 들리지 않아 들어가보니 남은 한 마리마저 물에 빠졌다 나와 젖은 채로 몸이 굳어있었습니다. 눈을 껌뻑이기에 들어올렸을때 제 손 위에서 마지막 숨을 내뱉고 눈도 감지 못한 채로 가버린 한 마리를 마저 묻어주고 유치원에서 돌아온 건이 단이를 무거운 마음으로 맞이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리자 건이, 단이는 한 차례 병아리를 보내서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지 텅 비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병아리 집을 들여다보며 허전해하고 슬퍼했습니다. 병아리 두 마리와 나의 두 아이. 네 생명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병아리 두 마리가 마치 내아이들인 것 처럼 느껴져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내가 잘해주지 못한 것이 크다는 죄책감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엉뚱한 것으로 채워준 무지함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이 마음은 사실 두 병아리가 아니라 나의 두 아이에게 향한 것이어서 혹여라도 내가 무지해서 다른 것을 주어 잘못 자랄까, 혹여 내가 잘 지키지 못해서 두 아이가 허망하게 가지는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도 알게되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병아리를 통해 직접 보니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엄마 자리를 얼른 내어주고 책임지고 싶지않은 마음을 고스란히 남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슬쩍 자리를 피해 나의 아이들을 맡기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책임 전가와 두려움과 죄책감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들여다보기가 너무 무섭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심어주신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얻은 경험이 내 속에 들어와 자리잡은 것은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것을 고스란히 내 아이에게, 병아리 두 마리에게 했을 때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헤매이는 마음으로 며칠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나의 묵직한 부담과는 달리 건이, 단이는 다시 병아리장 앞으로 찾아가 목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린 후 한 마리를 더 데려왔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건이가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단이는 아직 어리기에 건이에게만 한 마리를 안겨주시며 ‘한 마리를 잘 길러보렴’ 말씀해주셨다며 생글 생글 웃으며 데려온 모습에 혼자속으로만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그 때 식사 자리에서 목사님께서는 우리 가족에게 ‘이것도 경험이지. 두 마리 보낸 후 한 마리 기를 때 다시 시작하는거야. 그렇게 연습해서 책임지는 것도 배우는거야.’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아주 자신이 없어진 내게 해주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늘 나에게 ‘그건 네가 아니야. 다시 경험하면돼.’ 말씀해주시는 목사님. 두려워서 피하고싶던 나에게 다시 해보라고 말씀해주시고 건이 손을 통해 새로운병아리를 만났을 때 내게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하기를 이번에는 세세히 살펴가며 키워야지 마음먹었습니다. 오자마자 램프를 켜주고, 흙과 완겨를 깨끗하게 깔아주고, 밥과 물을 하루에도 수차례 깨끗하게 주기 시작했습니다. 혹여 혼자 있으면서 심심할까 싶어서 건이 단이와 함께 산책도 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애지중지하는 우리 병아리의 이름은 ‘코코’입니다.
두 마리를 보낸 이후 건이에게도 이름을 짧게 지어주는 모습이, 병아리 한 마리를 위해 산책할 때 고양이로부터 지키겠다며 의자를 두고 옆에 앉아 작은 발걸음을 기다려주는 인내가, 밥을 잘 먹는지 왔다갔다하며 지켜보는 눈길이, 아침과 저녁에 잘 잤어? 잘자~ 인사하는 말들이, 거실에 두고 같이 놀다가 똥을 찍 싸놓으면휴지를 가져와 엉덩이를 닦아주고 바닥에 놓인 똥을 인상찌푸리며 닦아주는 세심함이 쌓여갑니다. 이 모습은 아마도 나의 거울이지 싶습니다. 내가 곁눈질로만 한 지붕 아래서 식구라 칭하던 병아리를 키울 때와 지금마음을 다해 애쓰며 키울 때 보이는 모습이 다르기에 건이도 보고 함께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코코는 알까요? 이전에 두 마리가 있었던 경험이 있기에 아픈 이별을 뒤로하고 코코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게되었다는 것을.
이렇게 사랑받고 보살핌 받아 자라는 코코는 이제 날개에 솜털이 아닌 깃털이 자라고 있고, 레고로 횟대 대신 디딤발을 만들어주니 날갯짓하여 상자 위로 날아올라 상자 밖 세상을 제 발로 나오기 위한 시도도 합니다. 단단한 부리는 제 발밑만 연신 쪼아대다가 이제는 상자를 쪼아 구멍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제 갈길대로자라는 코코를 보면서 자람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나의 모습 그대로, 내가 가진 것을 잃지 않고크는 것이 자라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고민을 할 때 구찌뽕 밭에 올라가 잡초 제거 작업을 했습니다. 구찌뽕 나무가 줄줄이 놓여진 자리 옆으로 수 많은 풀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히 위협적이었던 것은 칡입니다. 칡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자라야하나봅니다. 그 자리를 잘 못 찾아 구찌뽕 나무에게 뻗은 손길을 잘라주며 내가 집중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타인인가 나의 가족인가. 구찌뽕은 나의 가족이요 칡은 타인입니다. 그리고 혼자 제 갈길로 자라는 구찌뽕은 내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나의 모습 그대로 곧게 자라는것이 내 소망이기에 이런 내게 기대어 자리잡으려는 칡은 나의 상처요, 책임전가하는 죄된 모습이요, 두려움으로 아무것도 못하는 연약함이요, 죄책감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부정이요, 분화되지 않은 사람이요, 나의성장을 억압하는 말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라내어 나를 나답게 자라게 하는 마음으로 구찌뽕 나무를 지켜주고 내려오며 무수히 많은 생각이 자리잡습니다. 잘라내야하는 것들이 참으로 많구나. 나의 자람을 방해하는 것들을 잘라내기 위해 하나님은 내게 병아리를 보내시고 구찌뽕 나무와 칡을 주셨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생명이 자라는 일은 누군가는 땀흘려야하고, 누군가는 흘린 눈물을 닦아주어야하고, 누군가는 더러운 자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줘야하고, 누군가는 세끼 밥을 잘 챙겨주어야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이일들을 감내하는 자리가 부모인 것 같습니다. 가끔 영적 부모, 치료의 부모님이신 목사님 사모님께 30대 때어땠는지, 이 치료사역에도 초보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듣곤합니다. 처음부터 지금 모습 그대로 사역하셨을것만 같은데 목사님께도 예수님을 믿기 전이 있었다는 것을, 사모님께도 엄마가 되기 전의 모습이 있었다는것을, 이 사역을 통해 만날 무수히 많은 사람을 위해 먹을 것을 걱정하여 생계를 담당하고, 치료를 위하여 머리 싸매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들으면 괜스레 위로가 됩니다. 나의 것들을 한 번에 바꾸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거쳐 안좋은 것들을 잘라내고, 또 영향받지 않으며, 누군가에게 받으며 자라고, 누군가에게 주며자라는 모습을 보게되는 놀라운 일들이 라파의 20년 넘는 모든 세월을 지나 오늘 나의 하루가 되어 나를 깨웁니다. 진정한 내가 되기 위해 새롭게 경험하며 알아가는 오늘의 하루를 차마 글로 다 담을 수 없으나 작게나마 올려봅니다. 벅찬 오늘이 오기까지 많은 세월 인내로 기다리시며 나를 자라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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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갯짓으로 상자 위에 올라온 늠름한 코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