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 아내의 이야기 - 물까치를 통해 받은 은혜 -

라파공동체2026.03.28 15:233

* 라파에는 연못이 두 개 있습니다. 그 중 위쪽은 올 해 완성된 큰 연못인데 이번에 강자갈을 깔아주었더니 분위기가 달라보입니다. 큰 돌들이 놓여있고 물도있고 분수도 있었는데 강자갈 하나로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보니 강자갈의 역할이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더 완성도있어 보이고, 더 자연 속 연못 같아 보이는 것이 강자갈 덕분이라니. 강자갈을 보며 작은 것들이 모여 큰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생각해봅니다. 감정들이 하나씩 모여 하나의 참 자기를 찾아가는 길이 되듯이, 사람 한 명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가듯이, 말들이 모여 위로와 자신감이 되듯이, 단 중독 하루가 모여 회복이 되듯이 작은 것들을 모아 큰 것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우리의 삶과 마음에도 작은 일들이 모이고 깔리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지난 월요일 남편과 집 앞 마당을 거닐다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찾아보니 구석에 놓인 비석 뒤로 작은 새 한마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이 손을 뻗어 조심스레 들어올리자 생명이 붙어있는지 살아 숨쉬는 배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데려갈까 말까? 묻는 남편의 질문에 고민없이 데려가자. 말하였습니다. 집으로 들어가 바구니를 하나 만들고 그 위에 수건을 깔아 새를 눕혀두었지만 워낙 높은 둥지에서 떨어진 터라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그 새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눈도 감고있고 털도 얼마 없어 몹시 작고 연약해보였습니다. 곧 있으니 입을 벌리고 울어대는데 얼마나 입이 큰지 순간 깜짝 놀랄 정도였고 그 입 속에서 들리는 뺘악뺘악 하는 소리는 너무 가냘퍼서 당장이라도 무언가 주어야할 것 같아 병이리 사료를 물에 불려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맞는지 알지 못하여 호미 하나를 들고 밭으로 나가 땅을 파며 지렁이를 찾아 통에 모아두고 배가고파 울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자 생각보다 자주 배고프다고 울어대어서 살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우는 소리가 참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입 속에는 작은 플라스틱같은 딱딱한 혀가 있었는데 손 끝으로 사료를 콕 찍어 입에 넣어주면 그 혀로 긁어 목 뒤로 넘기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습니다. 머리보다 목이 너무 가늘어서 고개도 못 가누는 아기 새에게 먹이를 주며 저는 자주 "너는 어쩌다 거기서 떨어져 버렸니. 누가 너를 밀었구나. 다리에 힘을 주고 밀리지 말지 어쩌다 떨어졌어." 하며 속삭이곤했습니다. 아기 새는 먹이를 먹은 직후에는 바로 똥을 누는데 엉덩이를 흔들며 바짝 올려 힘을 주고 똥을 누면 어미 새가 입으로 치워준다는 것을 어디서 본 적이 있어서 저도 집게를 하나 들고 똥을 치워주기 시작했습니다. 한 나절이 지나 밤이 되니 아기 새도 자야겠는지 울지 않고 밤새 잘 자서 설잠을 자던 저는 일어나 자는 아기 새를 살피며 잘 자줘서 고맙다고 속삭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인생 처음 조류와의 관계가 시작된 아침, 제 마음에 아기 새를 향한 돌봄과 사랑이 움트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침에 확인한 아기 새는 둥지가 움직이는 것에 반응을 하는지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바구니를 들어올렸더니 배고프다고 울어댔고 가는 곳마다 아기 새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들고다니며 회의 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요리할 때도, 차 타고 나갈 때도, 아이들과 놀 때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마다 함께하는 아기새를 보며 어느 덧 내가 나 자신을 투영시켜 돌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기, 있는 그대로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아기. 이 무력한 시기동안 받아야만 자랄 수 있고 자란 후에 홀로 살아갈 수 있기에 이 아기 새에게 주고 또 주는 것이 너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주면서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돌아보며 아기 새를 통해 나의 어린 시절 또한 이렇게 받아들여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바쁜 아빠의 부재와 그 속에서 홀로 딸 둘을 키워야 했던 엄마는 제게 많이 의지를 하였고 저를 통해 위로 받고자 할 때도 있었기에 그 순간들은 마치 '지금 내가 힘이 드니 너 마저 울어서 나를 힘들게 하지 마라. 너는 이것들을 해서 나를 좀 편하게 해다오.' 하는 말로 들려 버거웠지만 해내야만 했던 시절들이 사실은 저 아기 새처럼 받기만 해도 족한 때였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내가 아기 새와 같이 조금 더 울었더라면, 그저 돌봄이 필요한 때 받는 아이였다면, 의지를 해야할 때 의지를 할 수 있는 아이였다면 좋았을 것을, 하지 않으려 애쓰던 나는 내 스스로가 짐처럼 느껴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애써야 했기에 그것이 크면서 오히려 어른의 모습을 하고 아이가 누릴 것들을 요구하는 지금의 내가 되지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어린 시절 입 크게 벌려 울지 못했던, 가만히 받으면서 새끼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어른인 체 해야했던, 조용히 밀려나고 미는 대로 밀려 떨어지던 내가 마치 이 아기 새와 같았습니다. 헤매이는 엄마 아빠에게 의젓하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하지 말고 더 울어볼 것을, 악을 쓰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나지 말아볼 것을, 때마다 엄마 아빠 사이를 오가는 동안 쉽게 인사하고 잘 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 말라고 울고 불며 떨어져주지 말 것을,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표현해서 한숨쉬며 나를 받아들이더라도 엄마 곁에서 손길 한 번이라도 더 받아볼 것을 해보지 못한 것들이 왜 그랬던 걸까. 



 생각해보면 나는 미움받는 것이 싫고, 어리다는 것이 싫고, 나를 짐처럼 느끼는 것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내가 엄마 아빠에게 마저 좋은 사람, 좋은 딸이고 싶었나 봅니다. 그런 마음들을 억누른채 어른이 된 나는 어린 나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그대로 몸만 어른이 된 것임을 느낄 때 내게 와준 아기 새는 나와 어린 나의 사이를 이어주는 소중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내가 아기 새에게 해주듯이 상처받은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어린 나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의 결과가 아니라, 돌봄받고 싶었던, 의지하고 싶었던 마음을 알아주고 그렇게 하라고 알려주고 싶습니다. 어린 존재에게는 사랑받을 권리가, 존중받을 권리가, 쉴 권리가, 보호받을 권리가, 의지할 권리가 있기에 그것들을 잃지 않고 하나씩 발견하고 찾아서 아이들의 손에 돌려주어야 하며 그것이 어린 나에게도 필요한 것들이었음을 인정해봅니다. 이것들을 대신할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런 권리들을 모아 그것들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세상을 살아가야하는데 유실된 자리는 무엇으로라도 채워야 하기에 시기로, 질투로, 우월감으로, 일로, 인정으로 채우는 것이 아닐까. 이래도 좋고 이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원하는 것들을 알기 위해서는 저 권리들을 다 되찾아서 하나씩 진짜 내가 원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진짜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는데 말이지요. 



 그러나 착한 딸이고 싶었던 나는 무엇이든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남이 좋은 것들을 받아 괜찮은 척하며 지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내게 좋지 않은데도 표현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것들이 되려 나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았을까, 엄마 아빠가 가도 처절함이 없이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그것이 엄마 아빠가 가도 괜찮은 이유가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아이는 하나같이 다 소중해서 태어난 것 만으로 이 세상에서 돌봄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 시절에 돌봄받지 못한 것은 상처를 지닌 어른이 되게하고 그 상처받은 어른은 무언가를 책임지기 버거워 아이를 원하지 않거나, 아이가 있어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어른이 됩니다. 제게도 어린 나를 아기 새를 통해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아이들을 힘겨워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찾아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어른 나와 어린 나를 오가며 이 때의 상처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살펴보니 소중하게 자라야 할 아이들에게 내가 너무 쉽게 화내고, 지치고, 같이 하는 것들을 버거워하는 모습에서 늘 죄책감을 느꼈는데 그것은 내게 유실된 권리들을 찾아 누려보지 못했기에 줄 수 없었던 것들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나의 아이들에게 온전히 주기 위해서라도 어린 나의 상처를 돌보고 치유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내게 너무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온전한 나를 찾고 더 행복하게 가정을 꾸리고,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나의 아이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아기 새는 제게 운명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아기새는 내게 많은 것들을 주고 떠났습니다. 아침이 되어 밥을 주기 위해 바구니를 툭 건드렸을 때 울지않는 아기 새를 보며 마음이 무너지듯 아팠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땅을 파고 묻어주면서 아기 새에게 인사하기를 " 나한테 와줘서 고마워. 너는 내게 참 많은 것들을 주고 갔다. 아무 힘이 없던,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던, 왜곡된 시선이 많던 내게 너가 와서 잠시 자고, 잠시 울고, 잠시 어지르며 지냈던 시간들 모두 고마웠어. 이런 내게 와줘서 너무 고마워. 어린 나를 보게 해줘서 고마워 잘 가." 아기 새는 그저 떨어져 돌봄을 받고 갔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가장 중요하게 해야했던 일은 아마도 어린 나와 어른 나를 이어주는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이 아기 새를 절묘한 타이밍에 내 눈 앞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참 감사했습니다. 만약 내가 이 아기 새를 그저 나를 바라보고 먹이를 축내고 시끄럽게 울어대고 내가 아니면 죽어버리는, 연약한 새로만 봤다면 지나가는 한 의미없는 일이 되었을텐데 마치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다 죽어버리듯 그렇게 의미없는 일이 되었을텐데, 제게 새로운 시선으로 시각으로 보게하신 하나님께 참 감사합니다. 부정의 시각이 아닌 긍정의 시각으로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하시고, 운명처럼 받아들여져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존재로 느낄 수 있게 하신 하나님. 나의 죄된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아기 새를 볼 수 있어서, 어린 시절의 나를 볼 수 있어서 어린 시절의 나 또한 연약하고 무가치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나의 아이들 또한 내게 찾아온 운명적인 만남임을, 그 운명은 하나님께서 세세히 계획하신 일임을 믿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내 삶에서 부정적인 시각과 상처들만 주신 것이 아닌 그 부정을 긍정으로, 상처를 은혜로 바꾸시고 내게 행복한 일상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심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전한 나를 찾아가게 하심을, 왜곡된 시선이 아닌 올바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시는 분이심을 느끼며 이런 치유의 강자갈들이 모여 내 인생이 변하는 앞으로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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