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2)

라파공동체2026.03.28 15:242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2)



 아나뱁티스가 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자기 검열의 과정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에서 저는 제가 신학생 시절 겪었던 자그마한 학내 분규 문제에 개입하면서 겪었던 경험에 대해서 말한 바 있습니다. 「재침례교도의 역사」에 추천사를 써주신 그 교수님이, 당시는 총장이셨는데, 어느 교수님의 교수 재임용 탈락 이유에 대해 그가 메노나이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던 그 순간부터 메노나이트라는 이름은 기피해야 할 대상, 가까이 하면 안되는 대상으로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총장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문제가 굉장히 많은 집단이구나 하는 생각이 각인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제가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는 다른 데로부터도 왔습니다. 당시 학원분규가 발생했을 때 앞장 선 것은 젊은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총장과의 면담 일정이 잡혔을 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같이 늦깍이로 신대원에 입학한 40대 몇몇이 젊은 학우들을 대신해 총장과의 면담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그 며칠 전 학생들이 학교 잔디밭에서 연좌 농성 비슷한 항의 행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때의 분위기는 제가 젊은 날 경험한 격렬한 학내 분규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신학교 학생들은 시위도 참 얌전하게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상황을 전후에 제가 들은 이야기인즉슨 젊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출하고 시위하지 못한 이유는 학교에 찍힐까 봐, 총장에 찍힐까 봐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찍히면 나중에 졸업하고 필드에 나갔을 때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려움과 공포가 젊은 학생들이 소극적으로 행동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메노나이트라는 이름이 두려움으로 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면 신학교를 졸업하더라도 신학교에 찍히면 나중에 목사 안수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신대원 생활은 저와 다른 신학생들을 그렇게 길들였고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졌습니다. 



 나는 교단 혹은 교회의 파문이나 징계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찬성하고 권장하며 지지합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 중의 하나가 “권징과 징계를 잃어버린 교회”에 있다고 생각할 정도니까요. 제가 한국 기독교회사를 공부할 때 받았던 인상적인 내용 중 하나는 교회 교적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00년전 한국 교회에는 교회마다 교적부가 있었는데 그 교적부는 학생들의 학적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었는데, 그 항목 중의 하나가 교회의 징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김갓난이는 품행이 방정치 못하여 출교하였음”, “김돌석이는 술 마시고 도박하여 방탕하므로 출교하였음” 같은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같은 교단으로 교회를 옮길 경우 교적부를 지참해야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카톨릭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교적부를 관리하며 교인들을 치리하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 출석일이나 침례일 정도, 가족관계 정도를 파악한 교적부는 있겠지만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평가 기록하는 교적부를 작성하고 보관하는 곳은 지금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을 징계하고, 징계기록을 보관하는 교회도 거의 없다고 보아야겠지요. 징계하는 교회도 없겠지만 징계를 받은 교인이 그 교회에 붙어있으리라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교회는 그저 쇼핑하는 대상과 같아서 이 교회가 마음에 안들면 저 교회로 옮겨가면 그만일 뿐인 세태가 되었으니까요.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누구도 가족을 쇼핑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에 안든다고 가족을 내팽개치고 떠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가족 안에서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기르고 훈육으로 가르치며 양육합니다. 사랑 없는 훈육 없고, 훈육 없는 사랑 없습니다. 이 둘이 함께할 때 온전한 자녀양육이 가능해집니다. 훈육은 때때로 징계를 동반합니다. 가족이, 부모가 자녀를 징계한다고 해서 가족을 떠나는 자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도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새롭게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가족성”을 잃었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듯이 교회가 “가족성”을 잃어버림으로 쓸모없는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개별교회는 징계를 잃어버림으로 교회다운 교회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면 그 반대로 교단은 징계를 억압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단으로 낙인찍어 매장하고 파문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억압적 상황이란 자유가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가 떨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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