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4)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4)
제가 아나뱁티스트가 되기 위해 직면해야 했던 큰 장벽이 “두려움”에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저는 그 두려움이 한국에서 태어나 현대사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 세대 전수된 집단 무의식 현상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집단의 상처로부터 연유하는데, 이는 사람들의 회피, 방어, 합리화, 공격적 태도 등 두려움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다양한 태도를 낳습니다. 두려움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현대사회는 “힘”을 가짐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한 쌍인데 힘을 가지면 이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세상은 가르칩니다. 돈만 있으면,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권력 있는 자리에 앉으면 삶의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고 세상은 가르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힘”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힘을 추구합니다. 큰 교회당, 많은 교인을 추구합니다. 기독교 각 교단도 마찬가지로 “힘”을 추구합니다. 더 힘 있는 교단이 되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님도 힘을 추구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약함”을 추구하셨습니다. 칼을 가진 자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역사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거하셨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강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약함”을 겸손 가운데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과 힘을 추구하는 대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칼을 통한, 힘을 통한 통제와 억압을 멀리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현대 기독교 세계에서 그런 마음을 품고 그렇게 살아가는 개인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집단을 저는 아나뱁티스트 외에 찾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나뱁티스트라고 저 자신을 소개할 때 세상 사람 중 그 말에 유의미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게 뭔데? 하는 반응일 것입니다. 비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대부분의 기독교 평신도들의 반응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반응할까요? 목사들이나 신학 교수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의 숫자는 전체 기독교인 중 소수에 불과하겠지만 그들이 두려운 이유는 그들이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파문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공동체 학교> 개설을 둘러싸고 한동대와 한공협 사이에서 일어난 해프닝은 여실한 증거입니다. 누군가가 반감을 가지고 힘을 사용해 한동대 산하 평생교육원의 이름으로 강좌를 진행치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고 학교 당국은 이들의 요구를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공동체 학교> 프로그램을 한공협이 주관 주최하는 프로그램으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속이 쓰리고 아렸습니다. 날카로운 칼로 가슴 한쪽이 저며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야 지금은 나이 먹고 살만큼 살아 마음대로 하세요 하는 심정이지만 한동대 일원으로, 혹 그 일을 추진한 이가 40대의 젊은 교수였다면 학교 당국으로부터, 혹은 누군가 강성 신자들로부터 야기될 불이익을 두려워하게 되지는 않았을까요? On, Off 라인으로 30명 수준에서 줌 강좌로 진행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을 반대한 그 누군가가 이 강좌를 끝까지 다 들어보고 분별하거나 판단하는 아량을 가질 수는 없었던 걸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공동체 학교>에 대해 반대한 그 누군가가 이 강좌를 끝까지 들었다면 반대하는 이유와 논리가 더 많아지고, 반감은 더 커졌을지도 모릅니다. 10여 년 전 다일공동체 설곡수도원에서 최일도 목사의 인도로 진행된 “아름다운 세상 찾기”라는 영성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강력한 통찰을 가져다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후 우연히 그 프로그램에 대한 이단성 시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런 저런 자료를 검색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비판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보였지만 글을 쓴 그 사람은 거룩한 진리의 옹호자가 되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심리학을 치유사역에 적용한 어느 목사에게 가해진 신랄한 이단 논증의 글도 기억나고, 떼제공동체를 격렬하게 이단으로 몰아붙이던 어느 목사님의 유튜브 영상도 기억이 납니다. 최근 감리교단 내에서도 성소수자 편에 선 목회자를 파문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지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해결책은 어디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