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55)

라파공동체2026.03.28 15:243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55)



 제가 알고 경험한 아나뱁티스트들을 이런 사람들이라고 앞에서 기술한 바 있습니다. ⓵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 ⓶ 신자의 침례, 신자의 교회를 강조하는 사람들 ⓷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⓸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⓹ 공유적 삶을 사는 사람들 ⓺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 ⓻ 그리스도의 철저한 제자도를 실천하는 사람들 ⓼ 공동체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⓽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⓾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사람들 ⑪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⑫ 계급적 성직제도를 거부하는 사람들 ⑬ 신앙을 위해 목숨마저 내놓은 사람들 ⑭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⑮ 구원 이후의 성화를 강조하는 사람들 ⑯ 신앙(복음)을 성품화한 사람들



 그런데 제가 세상에서 경험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나뱁티스트들과 달랐습니다.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 같았습니다. 제가 만나고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평생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믿음의 고백 없이 그저 교회에 출석하기만 하면 신자로 쳐주는 풍토 속에서 교회가 믿음의 동질성을 제대로 확보하기가 어려워 보였습니다. 평화로서 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고, 간혹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들은 평화가 길임을 알지 못하고 평화로 가는 길을 모색하기에 분주했습니다. 공유적 삶을 동경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에 매몰된 신앙 생활, 교회 생활을 하는 이가 대부분 이었고, 공유적인 삶을 좌파 사상으로 매도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니 공동체로 사는 삶은 꿈도 꾸지 못할 영역이었고, 설혹 공동체를 말한다 할지라도 개별 교회의 이익의 관점에서만 공동체를 이해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내게 신앙의 자유가 필요하면 다른 이들에게도 동일한 자유가 필요함을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관용하는 이들은 드물었고 배타적 자유와 진리를 주장했습니다. 카일 아이들먼이 「not a fan – 팬인가, 제자인가」(두란노, 정성묵 역, 2012)에서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그리스도의 철저한 제자가 되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환호하는 팬이기를 자처하는 교인들이 더 많아 보였습니다. 아마도 임영웅 군의 콘서트에 가서 힐링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의 30%는 필히 기독교인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많으나 그것은 그저 명제에 불과하고 호국 종교의 영향을 받아 국가의 기독교화를 기도하는 이들도 많았고 어떤 이들은 아예 국가의 일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려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고난과 핍박을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 였습니다. 그러니 신앙을 위해 목숨마저 기꺼이 내어놓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목회자를 성직자로 알고 자신을 평신도로 낮추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자신을 평신도로 낮춤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과 책임, 의무 등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임하고 해태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창조의 생태계를 보존해야 하는 일에는 공감하나 그저 마음 뿐 일상에서 이를 실천하는 이는 드물었고 구원의 완성, 곧 성화를 위해 자신을 훈련(구비)시키는 이들 또한 많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자기 계발과 스펙 쌓기에는 몰두할지언정 자신의 성화와 하나님의 성품을 갖추기 위한 노력에 시간을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이 모습이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모임인 교회의 정직한 실체가 아닐까요? 그건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 허약하고 빈약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사역하고 있는 공동체와 제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인 것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왜 이리도 사람이 변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작년부터 우리 교회와 공동체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는 “아비투스”입니다. 엘런 크라이더가 「초기 교회와 인내의 발효」 (김광남 역, 2021, IVP)에서 사용한 그 단어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합당한 개념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용한 아비투스(habitus)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 몸과 마음, 의식과 무의식, 습관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차용하면서 크라이더는 그리스도인들의 아비투스가 – 좀처럼 변화하기가 쉽지 않지만 -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면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형제님의(자매님의) 아비투스가 변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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