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59)  

라파공동체2026.03.28 15:243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59)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예배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 의식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에게나 비신자들에게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건물이 아니라 ‘사람의 모임’이라고 강조해도 한국인의 머리속에 ‘교회’하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십자가 달린 건물이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것과 같습니다. 의식으로서의 예배는 팬과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잘 고안되고 기획된 일종의 콘서트나 쇼로 변질될 우려가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주연 가수가 되고, 성가대가 무용단이나 코러스가 되며, 예배 봉사자들은 행사의 편의를 도와주는 행사 도우미가 되는 것입니다. 목표는 예배에 참석한 이들에게 영적 감흥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참 은혜롭고 좋았어” 라는 찬사를 듣는 것이 목표입니다. 신자들도 그런 감흥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예배에 참석합니다. 오늘은 어떤 쇼가 펼쳐질지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이 낸 헌금은 콘서트의 입장료와 같아서 행사 주최측이 입장료에 걸맞는 공연을 펼쳐주기를 기대합니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신자들의 불평 불만이 쏟아지고 어떤 이들은 더좋은 만족을 제공해 주는 다른 콘서트를 찾아 교회를 옮깁니다. 함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교회 일꾼들은 예배 준비와 실행의 주체가 되고 교인들은 공연에 참가한 객체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예배는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에게 제공되는 영적 서비스가 됩니다. 경배받으실 하나님도 그저 이 공연의 들러리거나 객체 혹은 도구로 기능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라는 공연에 참가한 교인들의 영적 만족입니다. 예배가 영적 서비스 상품이 되어 교인들에게 잘 어필되고 만족감을 제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헌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 재정이 확보되고 일꾼들의 사례비도 지급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쯤되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고 예배 또한 더 이상 예배가 아닐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공연기획사, 엔터테인먼트 기업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인 묘사라 하실 분들도 있겠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틀렸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드려지는 예배 형식이나 2-3세기 초대 교회, 16C 종교 개혁기에 복원된 예배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 의식의 절차나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경배와 찬양이 어우러지며,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울려퍼질 것입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 더 나아가 틀린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데 – 예배 의식을 치르는 목적, 예배를 만들어 가는 이들의 자세와 태도, 함께 예배 드리는 이들의 상호관계 등등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혹은 동일한 목적, 자세와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할지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목적, 의도와 달리 숨은 의도와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도와 목적은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기 위함이지만 감추어진 의도와 목적은 예배 의식을 기획한 이들과 참가한 교인들의 심리정서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의도와 목적, 숨겨진 의도와 목적 사이에도 다소 복잡한 경우의 수가 존재합니다.

⓵ 겉으로 드러난 의도, 목적과 숨겨진 의도와 목적이 일치하는 경우입니다. 예배 의식이 진정성 있게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예배였다면 예배에 참가한 이들의 영적, 심리정서적 만족도 동시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⓶ 겉으로, 말로는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예배를 드리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참가한 교인들의 심리정서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경우 교인들이 만족했으면 하나님도 만족하셨을 것이라고 임의적으로 치부합니다.

⓷ 세 번째는 교인들의 심리정서적 만족을 추구하는 예배를 기획하면서 그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예배를 추구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과 속의 의도와 목적을 분별할 필요도 없다고 여기면서 자기 의로움을 확신하고 자기성찰에 게으른 경우도 있습니다.    

          

 예배, 혹은 예배 의식이 무엇이며,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에 답하기 위해서는 심리학적 접근도 필요합니다. 예배를 심리적(심리학적) 차원에서 정의하고 접근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신)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적, 심리적, 육체적 교류, 곧 코이노니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지만 예배의 주체는 신자들, 곧 인간입니다. 예배의 주체인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 이해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존재적 속성, 곧 마음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심리학이 그런 필요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은혜, 믿음, 구원, 예배 등과 같은 기독교의 핵심 개념, 언어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비투스” 개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리학은 19C말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된 현대 학문입니다. 초대 교회나 종교 개혁 시기에 학문으로서의 심리학,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의 아비투스가 형성되는 데 있어서 “무의식”은 심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무의식”은 또한 주변 환경과의 관계, 성장과정이나 사회 환경과의 관계에서 큰 영향을 받습니다. 보르디외가 “아비투스” 개념을 설정했을 때 그 역시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라 불리는 일단의 사회학자들, 라깡류의 사회학자들, 70-80년대 한국 사상계를 풍미했던 에리히 프롬, 현대에 이르러서는 슬라보예 지첵과 같은 학자들이 모두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의 “아비투스”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신자들의 “무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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