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77)

라파공동체2026.03.28 15:233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77)

           

 평화로 가는 길에서 제가 극복해야 했던 것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였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과 이어진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한민족의 집단무의식 안에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가 깊게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외부 세력에 의해 민족의 삶이 유린 당한 경험은 외부 세력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을 고취하고 힘의 우위를 추구하게 합니다. 그 힘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국방력이며 전쟁능력입니다. 힘을 통한 평화의 추구가 인류의 공통신념이라 볼 수 있는데, 외부 세력에 의해 큰 피해를 경험한 한민족의 피해의식(집단 트라우마)은 이를 한층 강화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개발독재 시대의 국가주의적 통치는 경제 발전을 통한 국가경제력의 상승을 국가와 개인의 최고 가치로 숭상하게 만들었고 물신숭배의 강력한 토양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도 이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민족주의, 애국주의, 반공주의, 경제 제일주의 사상과 신념을 신앙화 했고 국가 발전과 경제 발전의 궤를 따라 함께 성장해 왔습니다. 이들 사상과 신념은 기독교 신앙과 한 몸이 되어 서로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본래 나(我)라는 존재도 손(手)에 창(戈)을 들고 있는 존재로 두려움과 불안, 경쟁의 실존 상황을 창과 칼로 해결하려는 성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한민족 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상관 없이, 민족주의, 애국주의, 반공주의, 경제 제일주의 사상과 신념에 자발적으로 순응하고 동화되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인들에게나 한국의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평화는 오직 힘에 의한 평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힘에 의한 평화 외에 다른 평화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아나뱁티스트들만이 힘과 무력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평화를 통한 평화’를 주창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향해 퍼부어지던 폭력에 철저히 무저항, 비폭력으로 대응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의 편에 서기를 거부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폭력을 피해 온 세계를 나그네로 떠돌았습니다. 가끔 그들이 정착하여 평화를 누리며 살았던 때도 있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은 어김 없이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강요받았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1763년과 1789년에 이민 허가 칙령을 발표해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들의 병역 면제와 신앙의 자유를 약속합니다. 이에 따라 동유럽을 전전하던 후터라이트는 1,770년~1802년 사이 남부 러시아(오늘날 우크라이나) 볼가강, 흑해 연안에 정착합니다. 서유럽에 있던 메노나이트들은 1789년부터 러시아로 이주해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1853-1856년 사이 진행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과의 크림전쟁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참전으로 러시아는 패배하게 됩니다. 이후 러시아는 국가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병역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고 아나뱁티스트들에 대한 병역면제 칙령을 철회합니다. 그리하여 1870년대부터 이들은 캐나다와 미국으로 집단 이주를 시작하여 거기에 정착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미쉬 역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스위스와 남부 독일 지역을 떠나 1707년부터 1860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북미로의 이주를 완성합니다. 그들의 여정은 신앙의 자유를 위한 고난의 여정이었는데 그들의 원하던 신앙의 자유의 핵심에는 전쟁과 폭력, 살상을 반대할 자유로서의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유와 평화는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였습니다. 나는 인류의 역사에서 이렇게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앞에서 저는 16C 아나뱁티즘 초창기에 이슬람의 침략에 대해 무력을 사용해도 좋은지에 대한 논쟁이 모라비아 지역에서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무력을 사용하자고 했던 사람들은 검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슈버틀러(Schbertler)”로 불렸고,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무리는 지팡이를 가진 자들이라는 뜻의 “스태블러(Stäbler)”로 불렸다고 했습니다. 무력사용을 옹호했던 슈버틀러들은 오래지 않아 아나뱁티스트의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오직 스태블러만이 살아 남아 현대 아나뱁티스트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그리고 러시아로, 마지막으로는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걸어간 길은 그리스도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가시밭 길이었습니다. 평화의 길이었습니다. 복음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14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평화신학>, <평화교회>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그 길을 열어 놓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평화의 제단 위에 자신들의 생명을 내려 놓았습니다. 그들로 인해 “평화”가 기독교의 핵심 진리의 하나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바울이 늘 그의 편지 말미에 써놓았던 인사말 “은혜와 평강(평화)이 너희에게 영원히 있을지어다”에서 강조된 두 단어 “은혜와 평강(평화)”가 똑같은 가치를 가친 단어임을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증거했습니다. 은혜 없는 평화 없고, 평화 없는 은혜 없습니다. 평화는 은혜의 결과이고, 은혜는 평화의 원인입니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자유와 은혜와 평화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고 복음 그 자체였기에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조차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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