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78)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78)
아나뱁티스트들이 추구한 평화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흔히 아나뱁티스트들을 성서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성서 중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신앙생활의 기준으로삼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서해석학을 고수해 왔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서해석을 반대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평화”에서 찾는 그리스도인은 아나뱁티스트(형제교회, 퀘이커, 여호와의 증인) 외에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평화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히브리어 “샬롬(shalom)”의 의미를 반영한 번역어입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관계의 회복(reconciliation), 불화와 폭력이 없는 상태, 정의의 실현, 온전함의 성취, 공동체적 번영, 하나님과의 화목, 창조세계의 질서 회복 등을 의미하는 “관계적, 구원사적” 개념인데 신약의 에이레네 역시 이 개념에 근거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의 에이레네는 우리말 성경에서는 평안, 평강, 화평, 화목, 화해, 평화로 번역되고 있는데 개인의 심리적, 내적 평안,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화해, 하나님과의 화목, 종말론적 평화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에이레네는 개인의 심리적, 내적 평안을 의미하는, 개인 구원의 관점에서 주로 언급되어 왔습니다. 이에 반해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에이레네를 예수 사역의 중심, 복음의 진수로 이해하고 이를 실천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가지고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평화를 완성했다고 이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세계 사이의 깨어지고 어그러진 모든 관계가 평화롭고 화목한 관계로 복원되고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평화롭고 화목한 관계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가능한 것이었는데, 그 관계는 폭력과 억압이 없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정의와 공의가 넘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복음의 핵심으로 이해하였고 그것을 평화 사상으로 정립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 평화의 나라가 왔습니다. 누가는 예수의 오심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는 종말론적 새 하늘 새 땅에서 궁극적으로 온전히 완성될 것입니다. 전쟁의 시기에 아나뱁티스트들은 “적군이 쳐들어와서 네
처자식들을 죽일 때에도 너는 가만히 있겠느냐?”고 추궁당하곤 했는데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래도 나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겠노라”고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미 영생을 가지고 있으므로 죽어도 주님과 함께 있겠지만 주님을 모르는 저들에게는 주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고백하며 투옥과 재산몰수의 처벌도, 순교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이야말로 종말과 영원한 세상, 내세를 진정으로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은 예수님을 식민지 이스라엘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고 해방시켜줄 정치, 군사적 왕으로 생각하고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평화의 도성인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과 거기 사는 사람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하십니다. “평화”가 그들의 눈에 감추어져 있어서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와 하십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주님은 탄식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평화”와 “평화에 관한 일”을 세상 사람들도도, 기독교인들도 여전히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샬롬,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십자가 위에서 실현되고 완성되었습니다. 평화 중의 평화는 죄인된 인간, 원수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당신의 말을 스스로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 “원수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보여주셨고,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으리라”는 가르침의 본이 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