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79)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79)
<평화>, <평화신학>, <평화신앙>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전통 신학과 신앙의 저변을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전통 신학과 신앙의 골격을 이루는 <조직신학>의 주요 영역은 <구원론>과 <교회론>입니다. 교회론은 교회란 무엇인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인데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으로 정의됩니다. 여기에는 별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습니다. 신자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정의할 때 여기에도 별 이견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상당한 이견이 나타납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샬롬(평화)이 신약성경 헬라어에서는 에이레네(평화)로 번역되었는데 이 에이레네가 한국어 성경으로는 평안, 평강, 화목, 화해, 화평, 평화 등의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코이노니아가 교제, 사귐, 나눔, 섬김 등등의 단어로 번역된 것과 같습니다. 헬라어 에이레네를 신자 개인의 내적 평안과 평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목을 이룸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으로 번역한 것에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다만 코이노니아가 여러 단어로 번역됨으로써 본래 코이노니아 개념이 가지고 있는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의미가 부분화 되고 파편화 되듯이 에이레네의 개념 역시 서로 다른 단어로 번역됨으로써 그 의미의 다양성을 설명해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단어가 지니고 있는 총체성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을 지적해야 겠습니다. 남과 북이 대치된 상태에서 오랜 시간 군사독재정권이 내세운 반공을 국시로 알고 살아온 남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거나 비그리스도인이거나를 막론하고 평화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습니다. 신앙 안에서 평화는 단지 개인 구원의 결과로 얻어지는 내적 평안과 평강에 제한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에이레네는 예수 사역의 핵심이고 구원의 진수이며 교회론의 본질입니다. 성육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를 세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들을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예정에 따라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는 은혜를 부어주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구원의 핵심은 은혜로 얻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의 자녀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인데 그들은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 마 5:9)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된 정체성을 분명히 하게 되고 구원받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그들에게 부여된 “화목하게 하는 직책”(고후 5:18)을 완수함으로써 이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전권대사(고후 5:20)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에이레네)는 복음의 변방 개념이 아니라 중심 사상으로 자리매김됨이 마땅합니다.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구원 또한 그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특히 그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따라 마음과 영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으며, 깨어지고 망가진 사람 사이의 관계를 평화의 관계로 다시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와 이 세상에 대해서 평화를 가져다 주는 자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감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와 목적)도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었고, 당신 목숨을 평화의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셨으며, 구원받은 신자들이 살아가야할 이유와 목적도 평화를 누리고 평화를 이루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절대적 평화를 주창하고 그것을 삶으로 증명하기 전까지 세상에는 오직 한가지의 평화만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칼로 얻는 평화”였습니다. “평화를 얻으려는 자, 전쟁을 준비하라!”는 경구는 인류 역사를 관통해온 보편 신념이었습니다. 2,000년전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베드로가 칼을 꺼내 대제사장 말고의 귀를 떨어뜨렸을 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불법 부당한 십자가 판결을 받으셨음에도 저항하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비폭력, 무저항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것은 사탄과 불의와 불법과 폭력에 대한 영원한 승리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강력한 저항, 자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은 장렬한 저항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나뱁티스트 선조들의 평화를 위한 순교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들의 삶 가운데 재현한 것으로 무기력한 패배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저항이자 투쟁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