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95)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95)
<육화 신학>은 성육신의 신비를 일상의 실재로 구현하는 신학입니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가 변화산 정상에서 신비로운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한 후 황홀경에 취해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산 위에 계속 머물고자 할 때에 주님은 그리 아니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오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산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신비는 일상의 실재로 산 아래서 이웃 사랑으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면 그 어떤 신비 경험과 체험도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 /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주님 살아계실 때 세족식의 의례를 통해 몸으로 하는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고,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생명을 내어놓는 사랑, 그것도 아무 자격 없는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이타적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늘로 올리우신 후에도 여전히 육화 가운데 우리와 소통하시며 우리와 한 몸을 이루고 계십니다.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현현하셨을 때 바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을 때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대답하십니다.(행 9:5) 바울은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핍박한 적이 없음에도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심은 핍박받는 신자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고통이, 신자들의 아픔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살과 피로, 몸으로 전달되고 교통 되는 것입니다. 곧 육화의 관계 속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 떠나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의인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 25:37-39) 라고 물을 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라고 대답하십니다. 지금 이 땅에 있는 작은 자에게 행하는 것이 곧 주님께 대해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떠나가셔서 다른 시간과 공간에 계시지만 육화는 시공을 초월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우리와 떨어져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을 다른 차원에서 똑같이 느끼고 계신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런 현상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빛이 파동이면서 입자이고, 여기 있으면서 동시에 저기도 있다는 양자물리학의 최신지경은 만물의 존재 방식과 관계 방식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육화된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자들은 세상 모든 만물의 고통과 신음, 기쁨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는 <어른 김장하> 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 주목하게 된 것은 아마도 ‘어른’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저의 개인적 기도제목 중의 하나는 ‘어른이 되게 해주세요’ 였습니다. 따르고 본받아야 할 어른을 찾기 어려운 시대, 세상의 넉넉한 품이 되어 줄 어른이 사라진 시대라는 느낌이 들면서부터 였습니다. 대천덕 신부님도 떠나 가셨고, 문익환 목사님도 떠나간 이 시대, 어른이 다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새 환갑이 넘은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어른 타령 그만하고 나 자신만이라도 내 주위 사람들에게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태일 형제나 마리안느 마가렛 자매가 개신교와 카톨릭의 그리스도인이었던 반면에 김장하 선생은 종교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1944년생인 김장하 선생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약방에서 머슴 살이를 하던 중 해방 이후 처음 시행한 한약사 국가시험에 합격해 1963년 경남 사천에서 남성당 한약방을 개업합니다. 이후 1973년 진주로 이전해 50년간 운영합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는데 번 돈으로 장학·교육 사업에 힘썼고 여러 시민사회 단체들을 후원하였습니다. 그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학교가 안정화 되자 1991년 국가에 헌납하였습니다. 이때 가난한 학생들 1,00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습니다. 경상국립대학교 발전후원회장, 남명학관 건립추진위원장,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지리산 생명연대 공동대표, 진주신문 이사장, 형평운동 기념사업회 회장 등등 지역 내 많은 직책을 가졌는데 그것은 명목상의 직책이었을뿐 그가 실제로 한 것은 이들 단체를 묵묵히, 뒤에서, 소리 없이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행한 선행은 평생 지속되어 왔는데 그는 자신의 선행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철저히 감추어 왔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단 한 차례도 어떤 언론의 인터뷰에도 응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전 생애를 두고 실천해 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