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06)

라파공동체2026.03.28 15:233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06) 



 하우워어스는 “교회를 세상을 바꾸는 도구가 아니라, 이미 다른 질서를 살아내는 공동체”로 이해했고 도시 속에서 교회가 그런 모습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미쉬와 후터라이트는 도시 속에서가 아니라 농촌 속에서 그런 모습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농촌에 정착지를 잡고 수백 년을 살아왔습니다. 한때 그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금은 세공업, 시계 세공업과 같은 선진 기술로 생업을 모색하기도 했고, 북미 개척기에는 가장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과, 세상 문명과 먼 거리를 두기로 작정하여 살게 되면서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은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21C 대명 천지에 자동차도 없이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라뇨!  전기도 없이, 냉장고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뇨! 그러나 그들이 북미에 정착지를 만들어갈 때 그들은 말을 농사에 사용하는 가장 선진적인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시대에 뒤지고 문명에 뒤지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신앙으로부터 유래된 것이었습니다. 수백 년을 국가 권력에 의해 피해를 당해온 그들은 국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국가와 관계 없이 그들이 믿는 믿음에 근거해 살아가는 “대안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 갔습니다. 그들은 자급자족하기를 원했고, 공동체 내부 부조를 통해 서로의 어려움을 해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과 세상 문명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반하나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 곧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게 되고, 붉은 것을 가까이 하면 붉게 된다는 고사성어는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철칙과 같아서 그들은 세상과 가까이 하면 할수록 세상에 동화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이길 수 없었기에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작가, 역사학자, 철학자, 히브리대 교수로 문명과 미래를 연구해온 유발 할라리는 2015년 출간한 「호모데우스 – 미래의 역사」(김명주 역, 김영사, 2017년)에서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를 넘어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되는 “호모데우스”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인류를 괴롭힌 난제들은 기아, 역병, 전쟁이었는데 현대 인류는 이 세 가지를 나름대로 통제 가능하게 되었고 이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제의 실현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의제는 불멸 (Immortal), 행복 (Happiness), 신성 (Divinity)인데 인류는 끝없는 기술 개발을 통하여 노화와 죽음을 넘어 생명 연장을 꿈꾸게 되었고, 심리적 만족을 넘어 생화학적 조절을 통한 영원한 즐거움을 추구하려 하며, 인간(Sapiens)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여 신(Deus)과 같은 능력을 갖춘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려 하는 시대에 진입하였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스스로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을 기술로 AI를 발명하였지만 AI가 가져올 시대가 진정한 휴머니즘을 가져다 줄지는 미지수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알고리즘에 의해 인간의 자유 의지는 유폐되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 지며,  모든 일을 데이터에 의해서 기획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새로운 데이터주의(Dataism)의 디스토피아 시대가 열릴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 때로부터 10년의 시간이 흘러 유발 할라리는 2026년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AI와 인류의 미래”라는 강연을 합니다. 「호모 데우스」가 출간될 즈음은 AI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AI 시대가 개막하던 시기였다면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은 AI가 인간 삶의 제반 영역을 새롭게 창조하고, 그 스스로가 법인격을 부여받으려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고 진단합니다. 유발 할라리는 AI를 신으로 섬기는 AI교가 탄생하고 AI 성직자들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인간을 인간되게 해 준 “사피엔스”의 능력, 곧 생각하는 능력을 AI가 획득하면서 “나I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던 명제를 AI도 공유하게 되어 “AI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AI의 생각하는 능력은 이제 인간을 넘어섰으므로 인간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도래했고 법인격을 부여받은 AI가 인간의 우위에 서게 되는 세상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이 놀랍고 두려운 기술 문명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방법은 두 방향에서 찾아질 것입니다. 하나는 AI 기술 문명을 잘 받아들이되,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AI를 도구로 잘 활용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AI 기술 문명과 거리를 두고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마치 아미쉬와 후터라이트가 그렇게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두 번째 방법에 대해 거의 고려하지 않습니다. 문명의 우산 아래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두 번째 방법은 선택 가능지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는 자연인이다> 라는 프로를 동경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습니다. 시골에 와서 한달 살이는 할망정 시골로 이주하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미쉬와 후터라이트 사람들을 시대에 뒤쳐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낙오자요 루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직된 신앙의 소유자들이요, 율법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옥천 시골에 정착해 10여년을 살다보니 이들을 바라보는 저의 시각과 관점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생활의 터전, 삶의 환경의 변화를 통해 ‘도시적 아비투스’가 ‘시골적 아비투스’로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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