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10)

라파공동체2026.03.28 15:232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10)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시작된 크리스텐돔의 세계가 지속되면서 신학은 기본적으로 ‘도시 신학’과 ‘제국 신학’의 입장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더이상 고난과 핍박당하는 자가 아니라 귀족과 지식인의 반열에 서서 국가와 사회의 기독교화를 추진하고, 국가와 사회의 관리자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도시에 살았고, 도시적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에 익숙한, 도시적 ‘아비투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농촌과 시골은 ‘신학’의 중심지도, 중심 대상도 되지 못했습니다. 농촌과 시골을 신앙과 신학의 중심지로 세우고 이를 유지해온 이들은 기독교 역사상 오직 아미쉬와 후터라이트 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의 ‘아비투스’도 철저히 ‘도시적 아비투스’ 였습니다. 농촌과 시골의 존재와 그곳의 가치를 육화된 가치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현대 국가, 문명, 도시적 삶의 핵심 가치가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더 화려하게, 더 편의적으로, 더 이익이 남게, 더 성공적으로” 라면 농촌과 시골의 삶의 가치는 “느림, 기다림, 함께 함, 소박함, 아웅바둥대지 않음”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치는 대립적이라서 양립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두 가치 중 어느 것이 하나님의 것에 가깝냐고 묻는다면 저는 두 번째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도시와 시골의 가치를 결정 짓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존재의 유위성(有爲性)과 무위성(無爲性)의 차이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시는 인위성(人爲性)이 강한 공간입니다. 도시에서는 사람이 만들고 창조한 인위물들, 이를테면 차, 아파트, 명품, 돈 같은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추구합니다. 하지만 시골의 존재 기반은 무위(無爲)의 자연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자연은 사람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포용하고 수용합니다. 그러나 인위적인 것은 자극적인 것이고, 자극적인 것은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중독화 시킵니다. 현대를 데이비드 T. 코트라이트는 「중독의 시대」(이시은 역, 커넥팅, 2020년)라고 했고, 김태형은 「풍요중독사회」(한겨레출판, 2020년)라고 진단했으며, 강수돌은 「중독 공화국」(세창미디어, 2021년) 이라 불렀습니다. 영적 차원에서 중독의 본질은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 이를테면 물질이나 행위에 집착하고 그것에 우선을 두거나 그것과 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인위물인 것에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만든 것보다 자기가 만든 것을 더 좋아하고 높이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바벨탑 사건 이래 인간 내면에 지속되고 있는 근원적 죄성의 하나입니다. 도시 자체가 중독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시골에 내려와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도 제 일상을 지배한 의식은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더 성공적으로”였습니다. 공동체를 빠르게 성장시키고 싶었고, 효율성을 극대화해서 많은 중독자를 치료하고 싶었으며,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나는 무능한 목회자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열매도 제대로 거두지 못한 한심한 목회자요 패자, 루저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빠르지 않아도 되고, 효율적이지 않아도 되며, 중독 치료의 열매가 많지 않아도 되며,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왜 몰랐겠습니까? 그래도 되는 것을 알았지만 이왕이면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는 게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꼭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고 싶다. 되어야 한다’라는 인식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강박적’이고 무의식적으로 고착화된 것이어서 머리로는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 끈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거의 본능화된 욕구였습니다. 중독 현상의 본질 중 하나는 ‘알면서도 못하는 것’입니다. 술을 끊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시에 중독된 사람들은 도시의 가치에 중독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가치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더 성공적으로”만 존재합니다. 그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패자이고 루저일 뿐입니다. 도시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시 목회자들도 이 가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더 크고, 더 많은 교인들을 획득하고, 큰 교회를 세우지 못한 목회자는 실패한 목회자요 루저일 뿐입니다. 현대 도시인들에게 있어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죽기 보다 싫은 ‘강박’이 되어서, 무능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여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무능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무능하고 쓸모없는 인간을 만드셨을 리가 있을까요? 그럴 리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회에서 무능하고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아마도 장애인일 것입니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능력’과 ‘쓸모’의 관점에서 장애인을 보면 그들은 정말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역전됩니다. 현대 <장애 신학>의 정초를 세운 이는 중증정신장애인 공동체 <라르쉬>를 창설하고 운영해온 장 바니에일 것입니다. 그의 삶과 사역, 증언을 통해 세상은 ‘능력’과 ‘쓸모’, ‘효율성’의 눈으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 가치 기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장애인들이 세상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며, 복음은 그들을 변화시키려 시도하지 않고 그저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함을 통해 진면목이 드러남을 그는 그의 삶을 통해 확증했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난 복음의 진수는 헨리 나우웬과 스탠리 하우워어스와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신학의 옷을 입고 온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복음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관점이 존재함을 증명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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