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11)

라파공동체2026.03.28 15:233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11)



 <라파중독치유공동체>를 세우고, <예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모든 과정에 제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은 장 바니에일 것입니다. 중독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그들과 함께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라파중독치유공동체> 운영의 기본원리인데 그러한 원리를 세우고 실행하는데서 장 바니에로부터 받은 영향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의 책 「공동체와 성장」(성찬성 역, 분도출판사, 1995년)은 <중독치유공동체>와 <예수공동체>를 관통하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람들의 운영 원리와 생활 원리를 밝혀 주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장 바니에에게 중증정신장애인들은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이 들어나는 “연약한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가 드러나는 것을 그는 보았고 그 증인이 되었습니다. 장 바니에는 공동체를 단순한 기능적 조직이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공동체는 완벽한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용납하는 곳이었고 개인을 구속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소속감을 통해 개인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해방시키는 공간이었습니다. 장 바니에와 스탠리 하우워어스가 공저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온유함의 영성」(김진선 역, IVP, 2010년)에서 두 사람은 ‘약함의 신학’을 전개합니다. 세상은 능력과 효율성을 강조하지만, 저자들은 인간의 진정한 인간다움은 ‘약함(Vulnerability)’을 인정할 때 드러난다고 주장합니다. 지적 장애인은 사회가 중요시하는 '속도'나 '성취'에 기여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인간이 사랑받기 위해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는 존재로서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치 “탄광의 카나리아”와 같아 복음이 살아 숨쉬는 곳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타인의 약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있는 연약함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을 스탠리 하우워어스는 “온유함”이라 부르고 “온유함의 정치학”을 피력합니다. 장 바니에는 장애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삶 자체가 일상에서 폭력을 이기고 평화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우워어스는 교회가 단순히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 아니라, 세상이 무시하는 이들과 친구가 되는 온유함을 실천하는 ”대안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대안’은 영어로 ‘alternative’입니다. ‘대안’이란 둘 중의 하나, 혹은 여러 개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신앙도 결국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장애인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지, 아니면 그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삶을 살지를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그 둘 중의 하나를 고르는 것이 힘들어서 현대인들은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삶이 가능하도록 제도와 법을 정비하고 구비하지만 정작 일상 속에서는 그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합니다. 장애인 복지관이 세워지는 건 좋지만 우리 동네가 아니라 다른 동네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시에 하나님의 대안 공동체, 하나님의 콜로니가 세워져야 합니다. 똑같이 농촌과 시골에도 하나님의 대안 공동체, 하나님의 콜로니가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도시에서 하나님의 콜로니를 이루며 살아갈지, 시골에서 살아갈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자율의지가 온전히 작동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습니다. 알코올중독자들은 술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결국을 술을 향해 나아가고 술잔을 집어듭니다. 같은 이치로 도시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도 도시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를 실천하지 못합니다. 도시가 주는 편의성,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유감, 오감을 각성시키는 자극감 등을 떠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세상은 너무나 따분하고 무료하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옥천에 땅을 구입한 몇칠 후 밤에는 그 땅이 어떤 모습과 느낌인지가 긍금해 차를 몰고 밤길을 달려온 적이 있습니다. 그날따라 달이 없어 캄캄하기가 이를 데 없는데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달려왔습니다. 사위를 분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을 헤치고 운전하며 오는 동안 두려움이 저를 엄습했습니다. 캄캄한 어둠 저편에서 누가 나타날까 두려웠던 것인지, 자연의 어두움이 주는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두려움은 심장을 쫄깃하게 할만큼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시골 생활이 15년이 되는 요즘, 저는 캄캄한 밤이 너무도 좋습니다. 그 캄캄한 밤 안에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밤을 밤되게 해주는 것이 캄캄한 어두움인 것을 이제는 압니다. 밤이 되면 나 자신의 영혼도 캄캄한 밤과 더불어 쉼을 취해야 함을 압니다. 사람은 변하기 어려운 존재이지만 변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도시에서 환히 밝혀진 늦은 밤을 보낼 때가 지금은 몹시 어색합니다. 밤이 사라진 도시에서 살지, 밤이 살아 있는 시골에서 살지를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결국 선택에서 비롯됩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귀농 귀촌을 탐색하고 고려하며 선택해야 할 분명한 메시지가 복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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