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25)

라파공동체2026.03.28 15:233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25)



 목사가 되어서 목회자들의 세계와 교단의 일, 신학교의 일들을 지켜보면서 실망은 배가 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전하는 복음은 반쪽 복음인 경우가 많았고, 실제로 그네들의 정신 세계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강단에서 행하는 설교로는 거룩을 전하지만 일상의 삶에서는 성공과 안락을 추구하는 행태를 보이기 일쑤였습니다. 교단과 신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분규와 그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비민주성은 세상만도 못한 추함과 저급성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는”(사 1:6) 상태가 한국 교회와 기독교의 모습이었습니다. 중독자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 내게 유익이 되었던 것은 딴 생각 하지 아니하고, 두 마음 품지 않으며, 세상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복음에 충실한 삶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붙잡고 주님께 매달리지 않고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하루 하루의 날들이었으니 그것이 제게 은혜였습니다. 심적으로 감당키 어려운 극한 고난의 삶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주님을 위한 삶이라 생각했기에 충만한 기쁨과 뿌듯함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했던 바울의 고백은 그대로가 나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내가 믿는 기독교가 꺼져 가는 등불처럼 세상 가운데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음에 내 마음의 시름도 깊어 갔습니다. 그때 내 마음에 힘을 얻고 소망을 품게 되었던 것은 2007년 한국공동체교회연합(한공협)을 만나면서부터 였습니다. 한국 기독교와 교회를 염려하며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 영혼이 힘을 얻었습니다. 한공협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던 KAC(Korea Anabaptists Center)와 총무로 일하던 김경중 형제를 만난 것도 그때였습니다. KAC에서 출간한 모든 책들을 섭렵하면서 아나뱁티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아나뱁티스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신선했습니다. 아나뱁티즘이 지나간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오늘의 실재임도 그때 알았습니다. 500년을 이어온 그들의 고난의 역사, 순교의 역사가 제 마음을 격동시켰습니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를 현재의 삶 속에 복원하고, 주님의 산상수훈을 문자 그대로 삶으로 살아내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메노나이트, 아미쉬, 후터라이트로 분류된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 처음부터 저는 ‘공동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 교회의 ‘공동체성’이 저를 매료하였습니다. 말씀과 기도가 영적인 기초가 되고, 일상에서 교인들 사이에 교제와 돌봄, 공동 식사와 성찬이 진행되며, 아낌 없는 나눔이 물질의 공유로 까지 이어지는,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행 4:32)는 초대 교회의 삶의 모습이 따르고 이루어야 할 신앙의 모본이었습니다. 그 살아 있는 모본이 되었던 것이 ‘예수원’ 이었습니다. 그리고 해외의 따르고 싶은 모범은 부르더호프 공동체였습니다. 2010년 여름 한 달 동안 영국 부르더호프 공동체를 시작으로 프랑스 떼제공동체, 독일 베첼, 바시스 공동체, 헤른후트 공동체, 스위스 메노나이트 유적지를 탐방하고 돌아오면서 ‘예수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해 11월 라파공동체와 예수공동체를 일구어 갈 옥천 부지를 구입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공동체 건물 건축을 위한 후원 금을 모금하여 4억원을 모금하고 공동체 교회 건물을 건축합니다. 2011년 12월 15일 공동체 건축을 마치고 마침내 옥천으로 이주합니다.



 옥천으로의 이주는 제 신앙과 삶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나뱁티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농촌과 시골이라는 생활 공간의 변화는 제 삶과 신앙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아미쉬와 후터라이트의 신앙과 삶을 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게 돈이 많았더라면, 그래서 도시에 넓을 땅을 사서 그곳에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이곳 옥천의 깊은 시골로 이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도시 중심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도시 주변부거나 도시에 가까운 인접 지역에 공동체를 세우려 했을 것입니다. 제가 시골로 이주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없어서였습니다. 한 평당 수백만 원씩 하는 도시에서는 조그마한 땅뙤기조차 구입할 수 없었지만 시골의 땅값은 평당 10만원 이하로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서 저는 시골로 이주해 왔지만 역설적으로 돈이 있으면 시골로 이주해 넉넉하게 공동체를 꾸릴 수 있음도 분명합니다. 농촌과 시골에 와서 살면서 저는 시골 예찬론자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 생활 하기에 도시와는 비할 바 없이 좋은 조건이자 환경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골로 와서 ‘살다 보니’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농촌과 시골, 그리고 대자연의 품속에서의 생활은 도시적 삶의 양식, 도시적 아비투스가 시골적 삶의 양식, 아비투스로 변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도시와 도시 문명, 도시적 삶의 양식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꿰뚫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에 대한 ‘대안적’ 삶의 양식을 익히고 세우는 과정이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대해 ‘대안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실체가 무엇인지 몸으로 깨달아 알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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