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26)

라파공동체2026.03.28 15:233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26)



 아나뱁티즘의 세 분파인 메노나이트, 아미쉬, 후터라이트는 세 유형의 교회, 교회 양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노나이트가 도시를 기반으로 한 도시형 교회 양식을 나타낸다면 아미쉬 후터라이트는 농촌을 삶의 기반으로 하는 농촌형 교회 양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양식하면 우리 머리 속에는 바로코, 로코코 하는 건축 양식이 떠오르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양식은 건축물의 양식이 아니라 어느 특정 지역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양식, 생활 양식을 총합한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미쉬는 교회당이 없습니다. 교인들의 집을 돌아가면서 예배 장소로 사용합니다. 일반 제도 교회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주일, 주중의 종교 의식이나 신앙 훈련도 거의 없습니다. 신앙 훈련은 각자의 가정에서, 아미쉬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그들은 일상 생활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합니다. 아미쉬와 후터라이트가 농촌과 시골, 마을을 중심으로 삶을 일구어 가는 것은 그들의 ‘분리주의’적 태도에 기인합니다.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분리주의적 신앙 양식, 생활 양식’이야말로 기독교와 교회가 세상에 대해 어떻게 ‘대안적인 사회’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모범이 됩니다. ‘분리주의적 신앙 양식과 삶의 양식’ 자체가 이미 ‘대안적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세상과 선명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거룩”을 세상과 구별되는 기독교의 삶의 양식의 특징이라고 볼 때 이들의 삶에서 우리는 단연 “거룩”을 발견합니다.



 ‘저기에 아나뱁티스라는 사람들이 있어. 괜찮은 사람들이야’라고 생각하는 것과 나 자신을 아나뱁티스토로 규정 짓고, 그렇게 살아가기로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호와의 증인’으로 교단을 바꾸는 것과 같은 강도의 결단이 요구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정통 교리와의 관계에서 삼위일체 교리와 예수의 신성 교리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로 인해 소위 정통 교단들에 의해 이단으로 판정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들이 이단으로 판정받은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신앙적 이유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고 군대 징집 반대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들의 노력이 받아들여져 대체복무제도가 시행되기에 이르렀지만 그들을 이단시 하는 주류 교단의 태도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아나뱁티즘 교회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다른 교단에서 신앙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아나뱁티즘을 받아 들이고 아나뱁티스트가 된다는 것은 큰 결단이 요청되는 일입니다. 아나뱁티스트들과 여호와의 증인은 “전쟁 반대, 군대 반대”의 평화 사상을 견지하고 있고 세상에 대해 ‘분리주의적 관점과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어서 동류로 취급 당하기가 십상이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누군가에게 아나뱁티즘을 설명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럼, 여호와의 증인하구 똑같네”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니, 그건 아니구”하면서 이러쿵 저러쿵 긴 설명을 늘어놓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습니다. 정색을 하고 반론하는 것이 아니라 “네, 맞아요. 저도 여호와의 증인처럼 전쟁을 반대하고 군대를 반대한답니다”라고 대답하고 맙니다. 더이상 세상과 주류 교단의 판단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평화”를 말하고 주장하면서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교리의 절대성을 믿고, 자기 의에 빠져서  전쟁을 찬성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가깝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평화를 지지하는 자와 전쟁을 지지하는 자 중에 누가 더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단에 가까울까요? 그 답은 자명하다 할 것입니다.        



 아나뱁티즘은 교리적 측면에서는 정통 교리를 옹호하지만 그 교리를 절대적 기준으로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는 주류 교단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교리적 절대성을 절대적 기준으로 주장하고 적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리적 일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정통 교리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이들이 기독교 극우 파시스트 행태를 보이고 적극적으로 전쟁에 찬성하는 행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복음에서 멀리 떨어진 이단적 행태라 할 것입니다. 신천지, 통일교와 같이 세력과 돈을 이용해 권력과 결탁하려는 것 또한 명백한 이단입니다. 교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러므로 삶입니다. 형이상학적 교리의 절대성 보다도 눈에 보이는 살아 있는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신앙의 진정성을 가릴 수 있습니다. 



 아나뱁티즘 신학은 너무도 단순해서 사실 신학이랄 것도 없을 정도입니다. 성경을 ‘제자도, 공동체, 평화적 관점’에서 잘 요약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아나뱁티즘의 요점은 단순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행하며 살자. 예수님을 따르며 살자’는 것입니다. ‘서로 죽이지 말고 서로를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자’는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신학으로 사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삶으로 살아냈습니다. 그들이 신학을 발전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 신학이 교리가 되고 신조가 되어 누군가를 배제하고 죽이는 일의 근거가 됨을 수백 년간 목도해 왔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논리화하고 사변화하며 자기가 믿는 바를 교리로 절대화할 때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형이상학과 사변, 변증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믿음에 대해 다른 교단이나 교파, 혹은 세상 사람들과 논쟁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나뱁티즘을 신학적으로 대변하고 옹호하고자 했던 사람이 존 하워드 요더나 스탠리 하우워어스 같은 이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특정 이데올르기나 특정 교리, 신조, 혹은 신학에 선제적으로 노출되어 있고,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 이념적, 신학적 틀에 사변적으로, 변증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이념과 신학은 속성상 사변적이고 변증적이기 때문에 실제의 삶과 괴리될 가능성을 스스로 안에 내포하고 있는 약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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