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삭 6개월 간증문
안녕하세요
6개월 간증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게된 김이삭입니다. 처음 라파공동체에 왔을 때는 제가 중독자라는 생각은 커녕 중독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는데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중독이 무엇인지 배우다보니 제가 가진 중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닫고 나서도 공동체 식구들에게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지만 다행이 지금은 그 단계를 넘어 제 중독을 고백하고, 중독이 어떤식으로 제 삶에 나타났고, 제 삶을 망가트렸는지까지 이 간증을 통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6개월 간 이 문제들의 회복은 어디까지 진전이 되었는지, 앞으로 어떤 과제가 남았는지 제 스스로 진단해 본 것들을 나눠보겠습니다.
이 간증문을 쓰고자 제가 자각하고 있는 제 문제들을 정리해보니 7가지나 적을 수 있었습니다. 중독 외에도 문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들인지 간단하게 소개하고 각 문제별로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1. 저는 성중독자입니다.
2. 저는 미디어 중독자 혹은 스마트폰 중독자입니다.
3. 저는 게임 중독자 혹은 일,공부 중독자입니다.
4. 저는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저만의 공간에 칩거하는 히키코모리(방구석폐인)입니다.
5. 저는 공황장애와 우울증 환자입니다. 이 부분이 심해지면 삶의 의욕을 잃고 자살을 생각합니다.
6. 저는 저 스스로의 감정이나 타인의 감정에 둔감하여 잘 느끼지도 못하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며 친밀감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이는 결국 제가 공동체 혹은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그룹에 잘 녹아들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원인이 됩니다.
7. 저는 나이에 비해 사회경험이 부족하고 사회적 상식 및 경제적 책임감이 부족합니다.
이 문제들을 제가 정리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제 기준에서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는 희망을 주셨고, 계속해서 제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계십니다. 저를 회복의 자리로 인도하셨고, 회복의 책임이 저에게 있음을 깨닫게 하심으로 제가 이 문제들과 치열하게 싸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다 지치면 항상 적절한 방식으로 저를 위로하여 힘 주시는 분이 저의 하나님입니다.
그럼 성중독의 문제부터 이야기를 이어나가겠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성중독자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제가 이성을 대할 때 가졌던 태도 때문입니다. 그 태도는 이성을 대할 때 상대를 한명의 인격체로 생각하고 느끼기에 앞서 자동적으로 상대를 성적 대상으로 느끼고 이에 대한 판단이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태도가 나에게 매우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고, 자동화 되어있음을 깨닫게 된 계기는 그 당시 다니던 교회의 동갑 자매를 대하는 제 태도를 지적받았을 때였습니다. 성인이 되었지만 대학이나 직장을 다니고 있지 않았던 20대 초반의 저는 그 당시 교회 생활을 열심히 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개척교회의 몇 안되는 청년부 식구들과도 꽤 많이 친해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특히 동갑이었던 그 자매와 친해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사적인 부탁도 받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잘 지낸다고 생각하며 지내던 중 목사님께서 저를 불러 그 자매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기에 목사님께 왜 그런 질문을 하시냐고 물었고, 목사님께서는 그 자매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혹여 그렇다고 해도 제가 그 자매를 대하는 신체적 거리감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지적을 듣고 십대 때의 연애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때 연애 상대를 대하던 습관이 나와 친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성에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와 함께 제가 그 자매를 성적대상화 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전 이 문제를 해결해야 겠다고 생각하여 그 후에 시작한 대학 생활 및 선교 단체 활동 속에서 이 문제들과 씨름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몇년의 시간을 보내고 20대 중후반이 되었을 때 저는 이 문제가 많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연애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연애를 다시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연애들은 SM이라는 성적 자극의 추구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라파에 와서 중독을 배우면서 이것이 성중독의 재발임을 알게되었습니다.
라파에서 중독에 대해 배우면서 저는 가장 먼저 제가 성중독자임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씨름한 시간들이 있었음에도 이 문제가 아직 완벽하게 해결된 것이 아님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중독자'임을 모두의 앞에서 인정하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성중독자'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너무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클럽을 다니며 원나잇을 즐겼던 사람도 아니고, 성매매를 하고 다닌 것도 아닌데 '성중독자'라고 말하면 그런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성중독자'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즐기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전혀 해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여러 중독자들이 자신의 중독에 대해서 다른 곳에 비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라파공동체에서도 '성중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편하지 않다고 느꼈었기 때문입니다. 초반에는 성중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고, 제가 용기를 내어 제 성중독에 대해서 조금씩 오픈할 때마다 방금 첫번째로 말했던 것 같이 제가 생각하는 제 문제의 크기보다 더 큰 문제를 가진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누군가 (특히 자매들이) 불편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감추고 있떤 성중독의 문제가 들어나 결국 강제 퇴소에 이른 형제, 자매의 경우도 보고, 자신의 이성 의존에 대해서 이야기해준 자매님의 이야기도 들으며, 저도 계속 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6개월까지는 제 성중독을 정면에서 다룰 시간이 없었기에 가끔 다른 주제 가운데서 살짝 살짝 이야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혼자 묵상하고, 여러 수업 자료들의 내용들도 보다보니 앞에서 말한 수치심 때문에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여태껏 제 삶을 괴롭게 만들었던 제 스스로 만드는 제 삶의 문제들이 계속 반복되게 될 것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중독의 핵심 문제 및 특징 중 하나는 '인격체의 대상화(즉 물화)'라고 생각합니다. 일 중독자는 타인을 자신을 위해서 일해줄 일꾼 혹은 일을 위한 도구로만 보게 되고, 알콜 중독자는 자신과 함께 술을 마셔줄 사람 혹은 자신에게 술을 사주는 사람, 술 못마시게 방해하는 사람으로 타인을 봅니다. 이와 같이 성중독자인 저는 타인 중 동성은 성적 경쟁자, 이성을 눈요기 대상 혹은 나의 성욕을 받아주어 잠자리를 할 대상으로만 보았습니다.
저는 제 성중독이 시작된 10대 중반부터 대학에 들어가서 이 문제를 씨름하기 전까지 이 문제가 심각해져갔다가 대학에서 선교단체 활동을 하며 이 문제와 싸울 때 좀 잠잠해졌다가 군복무를 공익 근무로 하게 되면서 SM(성적 가학증과 성적 피학증)의 세계에 들어가면서 지금까지 다시 심각해져왔습니다. 그나마 라파공동체에서 성중독의 문제를 다루며 인정해가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저에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성중독의 증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스마트폰이 있으면 습관적으로 성인 웹툰을 봅니다. (공동체 생활 초기 2개월 동안 저는 중독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핸드폰을 사용했습니다.) 딱히 자위행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성적 자극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6개월 간증문을 쓰기 직전에 손을 다쳐 병원에 입원했을 때 혹시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목사님께서 핸드폰을 주셨을 때도 입원기간 며칠동안 핸드폰으로 성인 웹툰을 보느라 잠을 설쳤었습니다.
2. 잠을 자기 전 자연스레 성적 공상이 들고, 이전의 성적 행위들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야한 꿈을 꾸진 않았지만 그렇게 잠이 들어가며 비몽사몽한 가운데서 이전의 잠자리를 가졌을 때 성행위 직전과 직후의 상태를 느끼며 게을러졌습니다.
3. 이성을 볼 때 가슴이나 엉덩이와 같은 성적인 신체 부위에 자동으로 눈이 갑니다. 모든 남성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성중독자로서 저는 이것들을 끊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과거 제 삶 속에서 나타났던 성행위와 성적 대상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허비한 시간들을 생각하면 '이정도면 많이 좋아진 것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러한 행위를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제대로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면 결국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것임을 알기에 전 제가 성중독자임을 인정하고 항상 기억하며 이것과 싸워야 함을 지금 고백합니다.
제 성중독의 역사를 간략하게 이야기하며 성중독의 원인을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느라 집을 비우셔서 느껴야 했던 부모님의 부재감과 항상 둘이서 같이 집을 보던 남동생의 이수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찾아온 외로움과 이성에 대한 관심. 그보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같이 놀던 또래들중 힘센 친구들은 나를 종종 괴롭혔지만 다정하게 대해준 그 당시 또래 이성과의 시간. 중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했던 첫성경험과 그 당시 여자친구의 피학 성향으로 부터 발현한 저에게 이러한 욕구 즉 지배욕과 통제욕이 없었다면 일시적이었어야 했을 가학 성향, 그 친구와 헤어지고 그 헤어짐이 발단이 되어 중3부터 겪어야 했던 반에서의 이지메와 등교 거부, 그러면서 인터넷을 통해서 만났던 나와 같이 상처입은 이성과의 성경험 (이 때 저는 그들에게 가학과 피학이 섞인 성행위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강요함으로 얼마나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을까요?), 고2 고등학교 자퇴 후 중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의 멀어짐, 성인이 된 후에 겪어야 했던 사회에서의 실패와 본격적인 SM 세계 경험.
이러한 삶을 되돌아보며 제 성중독의 원인을 다시한번 정리하면 어린시절에 겪었던 '외로움'으로부터 연결되는 '돌봄', '사랑'과 인정'에 대한 욕구, 잘못된 성행위와 그 이전부터 보았던 음란물을 통해 형성된 '친밀감에 대한 잘못된 인식', 그리고 '지배'와 '통제' 욕망이 제 성중독의 기저에 깔려있었습니다. (이중 '지배'와 '통제' 욕구는 저 스스로는 제 성적 가학성으로부터 알고 있었지만 공동체에서는 이 간증문을 옮겨쓰고 있는 10개월 - 11개월 시점 (6월 28일)에 이야기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게임 중독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제 게임중독이 일중독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게임을 했던 이유 중 큰 이유가 게임 개발자로서 살기 위하여 게임을 분석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가상현실 세계를 만들고 싶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돈을 벌기 위한 직업으로 게임 개발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게임 개발자가 되는 길을 정말 험난한 길이었고 제 여러문제들을 가지고 게임 개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지금은 깨달았습니다. 10년 넘게 게임 개발자라는 길에 매달렸던 저는 그 직업의 발끝정도만 만져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게임을 좋아하고, 하고싶은 게임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게임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꼭 게임을 해야겠다는 집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게임 개발자가 되겠다고 '게임'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던 시간들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것도 다 공부라고 합리화하며 게임을 하며 보냈던 시간이 제 삶을 얼마나 많이 갉아먹었는지요. 책이든 영화든 어떤 미디어를 보든 그것을 내 것으로 소화하여 강의로든 글로든 표현하여 혹은 삶으로 살아내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면 그것은 공부도 일도 아님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게임을 넘어서 일 전체로 보면 제 일중독성은 더 쉽게 들어납니다. 제가 원하고, 제가 재미를 느끼는 일을 만나면 그것에만 집중해서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서 (특히 시간을 어겨서) 문제가 된 경우도 많고, 그 일을 하면서 제 무의식의 욕구 (특히 지배와 통제 욕구)가 발현되어 일을 과하게 하여 오히려 안하느니 못하는 경우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24년 6월 27일 라파 복숭아 나무 훼손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땀흘려 일한 저를 타인이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인정을 안해주면 억울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부모님과 그런 일이 많았던 것 같은데 구체적인 사건을 잘 기억나지 않고 막연하게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나에게 잔소리하며 화를 내냐며 싸웠던 기억만 나는 것을 보면 제가 회개를 해야할 부분이 참 많습니다.)
제가 게임 개발 특히 가상현실에 집착하게 된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역시 동생의 죽음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동생의 죽음을 실제로 대면할 수 없었던 (시체도 보지 못하고, 장례식도 가지 못하고, 그 유골을 뿌리는데 동참하지 못했던) 저에게 동생의 죽음은 애도되지 않은 일이었고 마음깊이 실감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저 동생이 사라졌다. 라는 무의식을 형성하고 초등학교 5,6학년 때는 '퇴마록'이라는 오컬트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마술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중1때는 가상현실을 만들면 그 속에서 동생을 만났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이과적 재능을 발휘하고 싶다거나 나만의 게임을 만들고 싶다거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기독교 철학을 공부하며 철학 공부로는 먹고 살 방법이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며 게임 개발에 집착했습니다.
라파에서 생활하면서 제 안의 일 중독 성향을 느끼지만 동물들을 돌보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알게되면서, 무엇보다도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이 문제가 조금씩 해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게임 개발을 공부하면서 배운 프로그래밍 지식을 취미로 혹은 이후에 제가 공동체에서 계속 살아가게 된다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하려고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이후 대학에서 전공하려고 계획중인 심리학을 이용하여 임상심리사 자격을 따서 해결하거나, 공동체에 합류하여 농장을 일구는데 도움을 주며 해결하거나 글쓰기를 적극적으로 하여 해결하거나... 뭐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음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중의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들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시니 굶기야 하겠냐는 생각으로 살아야겠지요.
세번쨰로 이야기하려는 주제는 '미디어 중독'과 '히코모리 성향' 그리고 공황, 우울, 자살 사고의 문제입니다. 이것들을 하나로 묶은 이유는 모두 '무력감'과 연결된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공동체에 남는 계기가 된 제 이야기의 핵심 문제가 이것이었습니다. 또한 최근에 가장 심했던 최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무력감'은 청소년기까지는 제 안에 부상하지 않았던, 그러나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의 실패와 세상 사람들과의 비교를 겪으며 부상하여 심각해진 문제입니다. 이는 실패와 좌절을 다루는 제 태도가 어린시절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청소년기까지의 저는 칭찬을 많이 받고 상도 많이 받는 아이였습니다. 다른 것은 신경쓰지 않고 공부만 잘하면 충분히 칭찬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시기였으니까요. 중2때 어머니의 가게에서 일어난 가스폭발 사고로 어머니가 전신화상을 입으시고 중3때 연애 문제로 반에서 이지메를 당했음에도 저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큼 성적을 잘 받는 학생이었습니다. 중3때 친구들과 함께 실업계에 가서 컴퓨터를 일찍 전공하고 싶다고 했을 때 담임 선생님이 뜯어 말려서 내신 200점 만점에 최소 170 이상이어야 갈 수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중3 때 결석을 많이 해서 출석 점수로 많이 깎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야자시간에 검도를 배우러 가거나 앉아서 소설책만 읽었음에도 성적은 중상위권에 머물러서 그때도 많은 질투를 받았습니다. 또한 제가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이 교장선생님의 귀에 들어가 교장선생님이 만드신 독서 토론 모임에 들어가게 되고 그 인연으로 고2때 자퇴 후에도 저를 돌봐주신 고등학교 교장선생님도 저를 칭찬하시며 저를 아껴주셨습니다.
이런식으로 삶의 어려움이 계속 닥쳐와도 칭찬받던 저는 그걸 견뎌내고 싸워나갈 힘이 있었습니다. 부모님과의 갈등이 힘들었지만 이 힘 (그것이 결국에는 과대자기임을 이제는 깨달았지만) 그것을 묵혀두지 않고 다투며 터트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죽고싶다'라는 생각과 몇번의 작은 시도는 이렇게 계속 싸우면서 살기 싫다는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었습니다. 이런 힘이 있던 시기에 저는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지만은 않았고 힘을 내기 위한 글도 많이 썼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자퇴 이후부터 성인이 되고 부터는 사회에서 실패를 반복함으로 이런 힘을 잃어갔고 공동체에 오기 전에는 '누가 나 좀 죽여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었습니다. 그나마 청소년기의 정교하지 않게 충동적으로 했던 자살 시도를 실패하고 죽을 고비를 몇번을 넘겼음에도 살아계신 어머니를 보면서 그리고 20대 초반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기도하면서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내면에 박아넣었기 때문에 더 이상 스스로 죽을 시도는 안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력감의 문제가 시작된 시기는 고등학교 자퇴 이후부터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간헐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해져서 미디어를 보며 누워만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공황 증상도 자주 겪었습니다. 칭찬받을 곳이 없어지자 조금씩 저의 자존감과 힘은 허물어져 갔습니다. 특히 알바를 자꾸 그만두게 되고 새로운 알바를 구하며 거절을 받았던 순간들이 가장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미디어를 보며 쉼을 누려서 일어난 힘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갈수록 더더욱 미디어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에서도 몇번 무력감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 (하지 않은) 시간들이 있었는데 목사님과 소장님이 사랑으로 따끔하게 꾸짖어주셔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내면의 문제였고 영혼의 힘을 쓰지 못한 것이었으며, 과대자기가 자꾸만 발동하여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고 임의로 행동한 결과였습니다. 회복의 책임은 나에게 있고, 내 삶은 내가 이끌어가야 하니 내가 힘을 내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힘을 받아 극복해야 했습니다. 제가 무력감에 빠져있을 때 어려움을 겪고, 걱정을 했을 공동체 식구들에게 사과와 감사를 전합니다.
무력감이 무서운 이유는 계속해서 악순환이 돌기 때문입니다. 무력감에 빠져있다보니 사회적 평가도 낮아지고, 사회적 능력도 떨어지고, 평가와 능력이 떨어지니 다시 실패하고, 실패로 인한 좌절감에 다시 무기력에 빠지는 악순환말입니다. (목사님을 이것을 판을 돌린다고 표현하시며 판을 다시 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실패를 하고 좌절을 겪는데 이 때 무력감의 판을 돌리지 않도록 내면의 힘을 기르고 기도하는 습관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마지막 주제는 '감정'입니다.
감정의 소통이 되지 않으므로 공감을 못하고, 혼자서 소외감을 느끼고, 결국 사회생활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이로 인한 어려움을 제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소통되지 않아서 관계가 맺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모르고 그저 '나는 원래 사람들과 소통을 잘 못해', '사람들은 나를 어려워해. 부담스러워 해' 라며 내 존재의 문제로 느껴왔습니다.
제가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고, 그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다가 뒤늦게 깨달아 표현할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나름대로 감정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명확하고 투명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축소하고 왜곡해서 표현하여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이유는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했을 때의 결과가 두렵고, 그로 인한 의견충돌이라도 나면 상대를 설득시켜야 할텐데, 그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년 간증을 앞둔 지금 이것이 제가 저의 욕구, 생각, 감정을 죄로 여겨 수치스러워 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1. 감정이 격해지면 긴장감에 공황 증상이 나타나고 그런 제 모습을 사람들(특히 부모님)께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부모님이 내가 아플 때 수용해주고, 내 감정과 상황에 공감해주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2. 어머니의 감정 표현이 부담스럽고, 생뚱맞게 느껴져 공감하기 힘들었기 때문'라는 생각도 합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어머니의 감정이 격해지거나, 술을 드시고 나서 표현하시는 감정은 저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같이 느껴집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전 제 감정을 타인이 이해해주거나, 수용해주거나, 공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타당하지 못하다고 저를 혼내거나, 본인의 감정을 앞세워 제 감정은 무시하고 짓밟거나, 무성의하게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부정적인 감정은 제가 그 감정을 왜 느꼈는지 설명해야 한다고 느끼는데 이를 설명하여 타인을 공감시키는 것이 매우 피곤하고, 어렵고, 그마저도 제대로 전달되거나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게다가 부모님의 감정 표현법이 저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고, 부담스러운 것으로 느껴지다보니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고, 대체할 방법을 찾거나 배우지 못해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깨달은 제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추가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이 떠올라 뒤죽박죽이 되어 결국 뭐가 뭔지 모르겠는 상태가 됩니다. 그 와중에 가장 핵심적인 생각은 '우리 엄마는 참 불쌍한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제 어머니는 가난한 시골 섬 마을에서 태어나셔서 또래들이 학교에 갈 때, 밭으로 들로 일을 하셔야 했다고 합니다. 그 뒤 젊은 시절 만나셨던 남자분의 딸을 낳았지만 그 남자분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지금의 제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을 하셨지만 아버지가 전부인에게 얻은 자식들을 데리고 온 것과 달리 어머니의 첫째딸은 데리고 오지 못하셨습니다. 지금도 이것이 한으로 남아있으시고 그 따님을 찾아서 만나고 싶다고 저에게 종종 말하고는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결혼 후 하게 된 시집살이는 무척 혹독했고, 결국 두분이서 아무것도 없이 도망치듯 내륙의 도시 안산으로 오셨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와서 벽돌로 집을 짓고, 집 앞에 우물을 파고 생활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사시다가 아들을 낳았는데 갓난 아기일 때 아버지가 파놓으셨던 그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두분은 열심히 살면서 집도 사고, 그 집에서 저와 제 동생도 낳으셨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열살 때 제 남동생이 아버지 휴가를 맞아 처음으로 놀러갔던 바닷가에서 사고로 죽었습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두명의 자식을 물 때문에 잃은 셈이었고, 그 결과 저는 물놀이라는 것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 뒤 바로 제 여동생을 낳아서 키우셨고, 제가 15살 때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식당에 불이 나서 어머니는 전신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로인해 대수술을 몇번이나 받으셔야 했습니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그 때의 상처로 아퍼하실 때가 많지만 새롭게 요양보호사 자격을 따서 일하고 계십니다.
어머니의 인생을 요약했을 때 제가 아는 고난만 이정도인데 실제로는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의 고통과 고난이 아프기 보다는 그 곁에서 느껴야 했던 제 힘듦이 괴로웠습니다. 어머니의 과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힘들었던 건 나의 힘듦은 어머니가 겪으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점도 있고, 매번 반복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짜증나고, 피곤하고,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겪은 고난이 객관적으로 너무 커보여서 제 사소한 어려움과 힘든 마음을 표현할 수 없고, 어머니도 그분의 삶을 감당하기에 벅차서 제 삶의 문제를 공감해주고 함께 견뎌줄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전 어렵고 힘든 일을 사람들에게 표현하지 않고 혼자서 견디며 해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혼자서는 견딜 수 없이 힘든 일을 만나면 그 문제는 숨겨두고 그로인한 부정적인 감정만 부모님께 화풀이하며 싸웠습니다. 그러고는 속으로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생각하며 억울해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어머니가 겪은 어려움과 내 어려움을 비교하며 견뎌내지 못하는 내가 문제라고 생각해서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비교하는 삶을 살다보니 저는 '사람이라는 동물은 본인 손가락 살짝 베인 것이 다른 사람 손 잘린 것보다 아프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동물이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긴 한걸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이런 생각들의 배경에는 '어머니의 고통보다 내 고통을 크게 느끼는 것에 대한 죄책감', '아픈 어머니를 돕는 것을 귀찮아하는 나에 대한 합리화', '내 고통을 이해받지 못함에 대한 서운함과 서러움' 등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번 '힘들다.','아프다'하시면서도 쉬지 않고 자꾸만 일을 만들어서 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전 '연민' 뿐 아니라 '짜증', '죄책감', '무력감', '귀찮음' 등을 느꼈습니다. "일 하고나서 아프다고 할거면 일 하지말고 걍 쉬어라"라고 어머니에게 계속 말했지만 듣지 않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일을 자꾸 만들어서 하는 어머니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로인한 반발로 저는 뭔가를 하다가 힘들거나, 피곤하거나, 아프다는 생각이나 느낌이 들면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어머니처럼 일을 하면서 아프다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라고 생각 해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화상을 입으셨던 사고는 제 삶의 큰 고통의 간접적인 시작이고, 어머니의 삶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해준 사건 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머니를 오해 아닌 오해하게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사고 때문에 병원 뿐 아니라 법원도 경험했었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된 법적인 문제의 뒤처리를 제가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 사건에 대한 법조계 사람들의 의견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힘든 일을 하면서 우울증에 빠지면 술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자살 시도로서 이런류의 사고를 내는 경우가 흔히 있다. 너의 어머니도 그런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로 인한 어머니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마음 속에 계속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라파에 들어오기 직전 이것에 대해서 어머니께 직접 물어보았었습니다. 어머니는 이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셨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적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이 대답이 그 당시의 진실이었는지에 대해서 굳이 따지고 들고 싶지 않았고, 그냥 내가 어머니를 오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셨었다.' 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제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어머니가 목숨을 잃을 뻔 했던 몇번의 사건을 경험하며 '인간의 목숨은 하나님 손에 있다'라고 생각하며 살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아버지는 제 안에서 모순적인 모습이 공존하는 분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아버지는 상처를 주었음에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반면에 어머니를 통해서 듣는 아버지는 바람을 피고 어머니께 상처만 준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들은 아버지는 여러번 외도를 했고, 자신의 용돈을 먼저 챙기느라 생활비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고, 어머니를 고생만 시킨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통해서 들었던 아버지의 모습과 별도로 제가 직접 경험한 아버지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출근해서 늦게까지 일하시는 분이었고, 제가 용돈이 필요하면 내켜하시지는 않으셨어도 내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어머니가 아버지의 험담을 저에게 자주 들려줬던 것에 비해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험담을 거의 하지 않았고 마음으로나마 어머니를 챙겨주고 싶어하는 분이었습니다. 결코 완벽하지도 정말 잘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럭저럭 평범한 사람, 평범한 아버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와 아버지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하면 나쁜 아버지보다는 좋은 아버지의 모습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연세가 드시고 약해지시며 거칠고 나쁜 점 보다는 좋은 점이 보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저의 아버지는 술 문제를 일으키신 적도 없고, 가정의 경제를 내팽개 치신 적도 없으며, 이혼함으로 가족을 분열시키지도 않은 좋은 (평범한)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께 받은 상처 중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제가 밤중에 집에 혼자 있다가 공황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서 119를 불러 응급실에 갔던 것에 대해서 저를 걱정하시기 보다는 비용을 이야기하시면 절 혼내셨던 일입니다. 저는 그때 무척 서럽고, 억울했고, 공황 장애라는 병명을 몰라서 아무런 도움도 못받은 것이 속상했었습니다.
두번째는 제가 받은 세뱃돈으로 소설책 10권을 한꺼번에 구입해온 것을 보고 크게 화를 내시며 책 한권을 반으로 찢으셨던 일입니다. 내 돈을 내가 쓴 것 가지고 그정도로 크게 혼나는 것이 억울했고, 책을 찢기까지 하셨어야 했나 싶어서 속상했으며, 돈을 어떻게 쓰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짜증났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저의 아버지는 표현이 서툰 평범한 아버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삶을 처리할 수 없어 라파로 도망쳐와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만 하고 있을 때, 부모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을 때, 어쨌든 찾아오셨고, 저의 일을 부끄러워 하시면서 목사님과 대면하시는 것을 어려워 하셨지만 결국 대화를 통해 저의 생활비를 지원해주시겠다고 하시고 빠지지 않고 지원해주셨던 분이 제 아버지였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아버지가 저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몰라서 잔소리하고, 화내고, 걱정만 하셨지만 좋은 아버지가 되는 길을 깨달으시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아버지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간증문을 쓰기 위해서 처음 입소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적었던 메모와 노트들을 다시 읽으며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라파에 처음 입소했을 때의 저는 상당히 부정적이고 방어적이었는데 지금의 저는 그런 모습과 태도를 어느정도 버리고, 정직하고 용기있게 행동하려고 노력중입니다. 특히 삶에 대한 태도는 제가 느끼기에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도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실 것이 무엇인가'에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로 꽤 많이 끌고 온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내 문제의 원인이 타인에게 있다고 할 지라도 회복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회복의 길보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훨씬 길 것이기에 이 깨달음을 끝까지 붙잡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제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하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간증을 마칩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