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게임,알콜중독자 박준입니다.

라파공동체2026.03.28 15:233

22년도부터 지금까지 공동체에서 생활하면서 게임,알콜 중독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고백하려고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오냐오냐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성인이 되기까지 제 통장에는 돈이 있었고, 항상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부모님이 계셨습니다.



 



초등학교 때까지 이천시에 살았는데 저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가 컸기에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늘 잘하기 위해 애썼던 저의 별명은 엄친아였습니다. 무엇이든지 잘하려 했기에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분당으로 이사오면서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나보다 잘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나는 늘 부족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맛 본 첫 좌절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좌절하는 모습이 싫어서 잘하려 애써보았지만 안되었고, 자연스레 부모님의 기대를 좌절시켰다는 생각이 죄책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그 모습도 잘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렇게 다시 부모님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축구하고 놀 때 나는 학원을 가고, 과외를 받았습니다. 늘어나는 학원과 과외 개수는 내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자리 같아 너무 싫었습니다. 나는 부족해서 당장 채워야 할 것들이 많은 아이인데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을 말하는 것은 부모님 기대를 좌절시키는 일이 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고, 놀고 싶다는 욕구를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배운 것이 거짓말이었습니다. 한 순간만 거짓말을하면 아버지,어머니를 기쁘게할수 있으니까 합리화를 하며 몰래 놀고, 학원이나 과외는 점점 답답한 자리가 되어 등한시 하다보니 시험 점수는 오를 수 없었습니다. 늘 시험 때만 되면 반짝이는 눈으로 기대하는 부모님을 좌절시키기 싫어서 이번 성적은 높게나올 것이다, 반에서 5등안에 들것이다라며 태연스럽게 그 순간만 모면하고 기쁜 마음을 주고싶은 마음에 거짓말했고 늘어가는 거짓말은 어린 준이의 대처 방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춘기가 되었고, 몰래 채우던 놀이 욕구는 점점커져 마음껏 놀 수 있는 비행 청소년이 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학원을 땡땡이치고, 친구들이랑 흡연을 하며 안 되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술을 마시며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고 오토바이, 대포차를 타면서 반항을 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비행속에서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권력,돈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또 어머니가 가지고계신 수치심,통제를 이용하여 수치스럽게 하고, 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즐기며 내가 되려 통제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이런 저의 마음을 알지 못하셔서 항상 친구들이 문제라고 이야기하시며 저를 캐나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타국에서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셨지만 저는 캐나다 도착하자마 친구를 만나러 나갔고 그 타국에서도 나와 가족을 추구하기 보다 친구를 택함으로 나를 이해해주며 위로해주는 이들에게 빠졌습니다. 그 속에서도 흡연을하고, 대마도 태워보고 하며 방황을 했으나 부모님께 받은 사랑이 남아있어서 방황을하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이었습니다. 방황 후 집으로 올 때마다 거짓말을하며 잘못했다고 했지만 그때 뿐이었고 고2때 한국으로 돌아왔을때도 방황하며 지내다 성인이 되었습니다. 한평생을 그 상황만 모면하고, 거짓말을 하며, 잘하는을 하며 살면서 성인이 되어도 바뀌지 않는 살았습니다. 21살 때 군대를 가게되었고 그 속에서도 잘 적응하며 하는 척,잘하는 척 하며 살다가 22살 때 아버지가 재판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후로 집안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를 전역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감옥에 가셔서 집에 계시지 않았고, 엄마와 저랑 여동생만 남아 있었습니다. 공무원들이 집에 들어와 빨간딱지를 붙이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의 빈 자리, 나의 무능함을 느꼈습니다. 살던 분당을 떠나지 못하고 작은 옥탑방을 구하게 되었고, 허리도 펴지 못하는 그 공간에서 셋이 지냈습니다. 이 때 저는 일을하며, 공허함을 술로 달래면서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며 위로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힘든 것을 술로 달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재판을 받아서 구치소에 계시는 모습을 받아들이기 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항상 너가 땀흘려서 번 돈아니면 너의 것이 아니라고 하신 분이 뇌물죄로 구치소에 계신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구치소에 들어가시면서 용돈도 끊기게 되었기에 평생 일을 해본 적 없던 저는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고, 원인도 인정이 되지 않아서 세상을 향해, 사람들을 향해 분노만 차오르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 믿어오던 아버지에 대한 불신, 불신에서 오는 분노만 남았고 이 복잡한 마음을 터 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또한 나눌 상태가 아니었기에 가족은 서로 불안한데 불안하지 않는척, 무서운데 무섭지 않은척했고, 그 분위기에 잠식되어 저 또한 감정을 억누르며 점차 나를 잃어갔습니다. 혼란을 느끼는 나, 불안한 나, 두려운 나를 억압하며 지냈습니다.



 



이 혼란의 상황조차 감당하기 버거웠는데 한 가지 사건이 더 일어났습니다. 제가 오후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일을 할 때였는데 퇴근 후에 집에 오는길 540분쯤 저희 집 앞에서 퍽하고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뭐지? 하면서 생각할 때 옥탁방 계단 불이 3, 2층이 차례로 켜지기에 다급히 달려간 곳에는 동생이 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저는 놀랬습니다. 소리쳤습니다. 구급차좀 불러달라고, 어머니가 내려오셨고, 그때 어머니께서 저에게 다른 사람이 들으니까 조용히 하라고 엄마가 구급차 불렀다고하시며 너무 아무렇지 않은 듯 쥐죽은 듯 해결하시는 모습에서 가족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환경조차 바꿔줄 수 없는데 떨어져 누워있는 이 순간 조차 목소리 내어 부를 수 없는 오빠라는 사실이 저에게는 죄책감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부모님 모두를 의지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었고 이 다급한 상황조차 통제하는 어머니의 그 모습은 내 목소리에 귀 닫고 말도 못하게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만 남아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공동체에서 동생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보내야한다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왜 동생의 죽음을 생각하면 먹먹하고 화부터 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애도하는 과정 중에 불현 듯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나며 분노의 원인을 알 수 있게 되었고 무척 불쌍한 내 동생을 비로소 놓아줄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어머니께서 내 목소리를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한 공간에 있지만 아직도 때때로 무언가에 사로잡히면 내 목소리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가 있는데 그 순간마다 저는 마음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부분은 앞으로 잘 풀어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동생이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에 들어갔지만 뇌출혈양이 많아지면서 가망이 없게되어서 마음에 준비를 하라는 의사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살려줄 것이란 기대를 했던 의사에게 좌절의 말을 들은 분노가 삭히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다 한 번 더 좌절을 경험했는데 당시 아버지가 계시던 구치소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니 당신 아버지는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라 외출을 할 수 없다. 다급한 상황인 것은 알겠으나 나라에서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기다려달라고 말하며 딱 한 번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선택을 해라. 살아있을 때 볼 것인지, 아니면 장례 때 볼 것인지에 대하여 되려 저에게 질문을 할 때 세상과 인간에 대한 경멸이 생겼습니다. 그 말을 하는 이에게 당신 집안이라면 이 따위로 일처리 할 것이냐고 화를 내다가 너무 큰 화가 되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지경이었습니다. 그 때의 분노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에 힘이 들어가며 치가 떨리는 느낌이 듭니다.



 



이후 아버지께서는 동생이 살아있을 때 보고싶다고 선택하셨고 경찰 4명을 대동하여 나오셨고 처량하게 범죄자 취급 당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그저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께서 다시 들어가시고 장례를 치르는 과정 중에서 장례비용 때문에 가족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놈의 돈이 뭐길래 이렇게 슬픈 날 가족 간에 싸움이 나는지 너무 힘들었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옥탑방 집주인은 동생이 죽었다는 이유로 집에서 나가라고 하고 어머니랑 저랑 둘이 아파트 원룸에 들어가 지냈습니다. 이사를 하고 무엇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어머니는 다시 일을 나가시고 저는 너무 공허해졌습니다.



이 상황에서 나를 받아주는 사람, 알아주는 사람 한 명이 없다는 사실이 처참했고 무너진 가정환경과 흩어진 가족들의 빈 자리가 큰 외로움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때때로 힘들 때 위로받던 친구들도 만날 힘이 없었고 큰 공허에 사로잡혀 한동안 동생이 있는 납골당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혼자 있는 집은 무척 견디기 힘들었고 세상 어느 곳에도 속하고 싶지 않아 방 구석에 남아있기를 오랜 시간동안 하다가 차츰 익숙해져갔던 때 게임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속 이야기를 얼굴 보지 않아도 되는 게임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며 게임 속에서 현실을 잊었고, 그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전부터 게임을 좋아하긴 했지만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 점점 편안함을 느꼈고, 가진 것도 죽음도 다 다시 시작하고 내가 만들어갈 수 있는 그 게임 속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게임을 더 찾게 되었습니다. 현실에서 잃은 소속감을 게임에서 느끼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내게 잘한다고 할 때, 내가 없으면 질뻔했다고 말할 때는 어릴 때부터 받지 못한 인정을 받는 느낌이었고 전능감, 소속감을 느꼈습니다.



 



현실에서는 늘 부족한 아들 준이였지만 게임 속에서는 나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인정을 받으며 게임을 하다보니 현실에서도 스카웃제의도 들어오고 나이가 있는편이라 선수는 하지못했지만 KT에 코치로 취직하며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게임은 나를 바꿔주는 도구, 현실과 이어주는 도구였습니다. 게임 캐릭터를 키워주면서 돈을 벌때는 수입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낮에는 게임 속에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지내고 저녁에 사람들이 없어지면 벌었던 돈으로 술을 사 먹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아버지께서 출소하였고, 보호관찰시간에 아버지는 집에 계시면서 늘 집을 청소해주셨습니다. 우연히 청소하는 뒷모습을 봤을 때, 축 처진 아버지 어깨가 예전에 내가 기억하고 마음에 품고 있던 아버지가 아니라 힘이 빠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아버지가 있는 존재 자체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잃었던 현실의 한 편이 찾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권유로 농협중앙회에 취직하게 되었고, 근무하고 있던 아내 박초림을 보고 그러한 마음들이 사라졌습니다. 초림자매랑 결혼하고 싶었고, 어떻게든 자리 잡고 싶었고,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싶었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싶었습니다. 초림 자매랑 연애 중 건이가 먼저 생기게 되었고 우리는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기까지 과정이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자매는 기독교집안이었고 장인,장모님은 목사와 결혼할 줄 알았다며 딸에 대한 기대감을 제가 좌절시켰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저를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매를 만나는 동안 좋았는데 결혼은 저를 다시 좌절시키는 일의 반복이 되었습니다. 장모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않은 그저 나부랭이 사위였습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부터 언제 집을 구매할 것이냐라는 압박이 들어오고 조금만 더 있다가요, 라는 말로 차일 피일 미루는 사이 다시 거짓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재판이 끝나면 돈을 받는다, 우리 집이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거짓말로 나의 어머니를 속이듯 장모님을 속였습니다.



 



불안정한 내면을 갖고있던 저에게는 어렸을 때 받은 압박감과 동일 했고, 회사를 다니면서 퇴근하면 직장과 장모로부터의 압박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술취한 상태로 나를 전능하게 만들어주던 게임 영상을 보면서 잠을 청하며 살았습니다. 술 문제가 점점 심해지면서 농협계약직은 월급이 너무 적다, 같은 노동수준에서 돈을 더주는 회사로 옴겨야겠다라는 핑계를 대면서 회사를 옮겨다녔습니다. 그런 방황하는 모습을 본 아버지께서 새마을금고, 산림조합, 안양농협등 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해주시며 나의 삶을 대신 처리해주고 계셨고 저는 면접만 보면서 부모님 그늘 아래에서 지냈습니다. 그렇게 보내주신 직장도 얼마 못 다니고 그만두었습니다. 항상 아내는 나를 감싸주기 바빴고, 혼전순결을 지키지않고 결혼한 죄값이라고 질타를 받을까봐 저의 술문제를 숨기면서 지내다 제가 술마시고 차에서 잠들었을 때 퇴근했다고 말했는데 4시간동안 연락이 두절되자 저를 찾겠다고 나서는 상황에서 처음 장모님께 제 술 문제를 말하면서 가족들에게도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술로 인해서 삶을 처리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교회 집사님을 통해 몸 쓰는 직장을 다니면 술 생각이 덜 날 것이다 라며 인테리어를 다니면서 몸 쓰는 일을 했지만 그 집사님이랑 같이 일하면서도 매번 술을 마셨고, 둘이 다니는 일정이었기에 뻔히 알았을텐데도 마시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몇번 눈을 감아주시기도 했지만 그 거짓말하는 수준이 너무 뻔뻔스러웠기에 나중에는 경찰서에가서 음주측정을 함으로써 음주가 나왔는데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나에게 두손 두발을 들면서 가족들을 불러모아 준이 술문제는 완전 병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때까지 내 의지가 부족한 것이라고 했고 마음만 먹으면 끊을 수 있다며 그 상황만 모면했습니다. 그래도 가족들이 들어주지 않았고 너무 실망스러워하기에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가 술 끊게 해달라고 했지만, 쉽사리 입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버지께 병원에 입원시켜 달라고 이야기하고 기다리면서 마지막 술이다라며 술을 마셨고 그렇게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입원했다 나와서는 조절망상에 빠져 나같이 젊은 사람이 무슨 알콜중독이야? 의지만 부족한거지 하고 술을 마셨다가 원상태로 돌아가는데 2주일도 안 걸리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교회 집사님이 라파공동체가 있는데 준이를 거기 한번 보내보라고 이야기했었고, 가족들은 그 이야기를 이혼할꺼냐 아니면 여기 갈꺼냐? 그래서 마지못해 간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의 마음 상태는 혼자서 끊을 수 있는데라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산속에 있는 교회는 누굴패고 목줄채우고 한다는데,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그러지는 않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 남은 걸림돌은 치료기간이 1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서 열심히 하면 빨리 나올 수 있겠지 하는 마음에 목사님께 전화를 걸었고, 준비물이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았습니다. 또 통신 기기는 사용이 가능한지 여쭤봤는데 사용이 어렵다라는 말을 듣고, 그래 어차피 3달 정도 있다가 나올건데 라고 합리화를 하며 충북 옥천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 도축장에 끌려가는 송아지가 된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라파공동체로 향했고, 장모님은 저에 대한 불안한 마음에 눈감고 있어라 너 또 길을 외워서 술 사러 나올거 같으니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파공동체에 도착했는데 장화를 신고 수레를 끌고 오시는 목사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사님 모습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장화에 수레를 끄는 모습이었지만 눈빛에서 카리스마를 느꼈고, 이 곳에서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가 끝까지 불신을 놓지 못했지만 상담을 하면서 점차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처음 와서 댤갈을 닦는 형제들의 모습 중 규태 형제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데 추운 겨울 피죽도 못먹은 듯한 얼굴이라 다시 불신이 되살아나 저 형제 어디 맞아서 멍든데는 없나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한 형제가 나한테 말을 걸면서 나는 알콜중독이에요 형제님은 뭐에요? 라고 물었을 때 저는 알콜 의존이예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형제가 알콜 중독이나 의존이나 똑같아요. 라고 말했고 저는 아니에요. 중독은 아니예요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형제가 웃으면서 배우면서 달라질거니까 걱정하지말라고 했고 그 이후 하루하루 적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생활하던 중 점차 파악이 되니 중독 본성이 살아나 한가지가 걸림돌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도박중독자 형제가 알콜인데 왜 핸드폰 가지고 오지 않았어요? 알콜은 핸드폰 쓰는데? 라는 말에서 제 본성이 깨어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다른 알콜중독이라고 이야기한 형제들은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나는 뭐냐 왜 목사님께 통신기기를 물어봐 가지고 안 가지고 왔을까 라는 후회가 마음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이나 마음을 솔직히 말했으면 좋았을텐데 저는 자연스레 핸드폰 반입에 타당한 이유가 없으면 사용이 어려울 것 같다고 임의로 생각하게 되었고,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 목사님께서 거절하지 않도록 댄 핑계가 대학교 졸업을 하지못했으니 1년 기간 동안 사이버대학교라도 들어서 졸업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물을 때는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목사님께서는 ‘1년시간동안 형제님한테 시간을 투자하세요. 1년 후에 공부해도 늦지 않습니다.’ 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고, 우리 부모님과 달리 만만치 않은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께 거절당하자 마음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절당한 후에 몰래하던 습성이 있던 저는 아버지 어머니를 조종하여 핸드폰을 밀반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규태 형제한테 걸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예배당에 저녁 모임 끝나고 남으라고 하셨고, 형제랑 저랑 목사님이랑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저는 끝까지 라디오인데 저 형제가 잘못 본 것이다라고 거짓말을 하다가 규태형제의 정확한 화면, 위치를 설명하는 말에 마지못해 핸드폰을 사용했다고 실토했습니다. 이후 거짓말이 그치지 않고 휴대폰을 저수지에 가져다가 버렸다고 말했고 기기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상황을 무마시키기 까지 했습니다. 사실은 휴대폰을 옷으로 감싸 여행용 캐리어에 보관했고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을거라는 마음을 가지고 공동체 생활을 계속 했습니다. 문제는 드러났지만 거짓말로 위기모면에 성공했던 저는 밑바닥을 보이지 않은 마음가짐이었기에 형제들과도 형식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있는 척, 착한 척, 도와주는 척하며 지내다 9월 손가락을 글라인더에 다치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가서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핸드폰이었습니다. 혹여나 나를 시기하는 사람이 내 방을 뒤지다가 발각되면 어쩌나? 이런 마음에 손가락이 다쳤지만 안중에도 없고 핸드폰을 챙기러 공동체로 왔습니다. 핸드폰을 챙기고 필요한 것을 챙기는 척 핸드폰을 숨기면서 공동체를 나와서 병원으로 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행동이 끔찍할 정도로 괴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 사람이 이렇게까지 추악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나서 통증 때문에 힘든 시간이 지나고 지낼만해지니까 그 핸드폰으로 게임 이벤트를 결제하기 위해 아는 지인에게 돈을 빌리고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목사님,사모님께서 병원에 방문하셨고 책도 주고 가셨지만 그저 핸드폰은 없는 척, 그냥 TV보면서 지내고 있다는 태연스러운 거짓말을 했고, 또 공동체 식구분들이 오셨을 때, 회개하는 척 상처를 보면서 내가 중독에서 있을 때 가족들은 더한 상처를 받았다는 식으로 아는 척하면서 회복한 척하는 인생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퇴원하고 공동체에 돌아와서 의인인 마냥 살았습니다. 12월이 되고 아내가 이사오고 며칠 안되어 병원에서 핸드폰한 사건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전 직장에서 비슷한 형님한테 5만원을 빌리고 게임을 했는데 그 회사 형님이 동료에게, 동료가 장모님에게, 장모님이 초림이에게 초림이가 목사님 사모님에게 말하면서 나의 중독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도 똑같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병원에 같이 입원한 태국사람이 내가 심심해 보인다고 핸드폰을 빌려주었고 그것으로 게임을 했다고 참 말도 되지 않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100%믿고 100%믿지않는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저 목사님 사모님은 그 일도 징계로 땔감 나무를 해오라는 것으로 마무리 해주셨습니다. 그러다 15개월이 되었을 때 나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15개월될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 이유는 핸드폰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핸드폰을 구매할 때도 게임을 잘하기 위한 디자인을 보는 것이 목표였기에 생활비도 부모님의 돈으로 내던 내 수준을 파악하지 못하고 Z폴드5를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에왔을 때 아차싶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예수의 단순의 삶을 살고 싶다고 한 녀석이 최신핸드폰을 구매하고 왔냐고 이럴 거면 나가서 살던가 하라는 말씀에 아차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그 핸드폰을 저수지가서 버리던가 반품을 하던가 누구를 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핸드폰을 반품을 하려고 했지만 개봉해서 되지 않는다는 핸드폰 가게 사장님 말씀에 그럼 누굴 줘야하는데 하다가 결정한 것이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시력이 좋지 않으니 주자고, 그리고 아버지 핸드폰을 받고 아버지는 새 핸드폰으로 사용하시는 과정을 거치면서 목사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는 척을 했습니다. 그러다 16개월 되었을때 둘째 아들의 생일이 막 지난 날이었고 덕희형제님이 방문하여 간증하던 때 저는 게임에 빠져 졸았고, 저녁에 족구를 할 때도 게임을 켜놓고 족구를 하며 정신이 팔려있었고 아내가 사진을 찍으려다 제 핸드폰에 게임이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게임중독이 수면위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수차례 핸드폰과 관련된 문제들이 하나씩 되짚어볼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걸렸을때도 저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내는 게임 구동 뿐만 아니라 결제 내역까지 파악한 상황이었고 그 순간에도 성일형제, 유민자매, 목사님, 사모님, 아내 앞에서 내가 결재를 한 것이 아니고 내 아이디를 대신 키워준 사람이 결재를 한 것이다라며 거짓말을 했고, 목사님께서 내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렌식을해서라도 밝혀낼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때에야 두려운 마음에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전부터 저수지에 핸드폰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고, 병원에 갔을 때도 제 핸드폰이었고, 이것 또한 제가 결재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퇴소조치를 당하게되었고, 모아둔 돈이 있는 통장을 핸드폰과 함께 들고 공동체에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성일형제가 옥천까지 태워다주면서 저는 옥천역에서 기차표를 끊고 부모님이 계시는 시흥에 갈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집에 간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망연자실했고 제가 너무나 미웠습니다. 한편의 마음에는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 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지 않고 환불하고 그저 울면서 방황하다 대전 판암까지 걸어 갔다가오고, 결국에 옥천에 남아 모텔을 잡고 지냈습니다. 다시 의존하고 싶은마음에 부모님이 계신 시흥으로 갔었는데, 가게로 찾아갔다가 무슨 낯짝으로 들어가나..라는 마음으로 다시 시흥에서 옥천으로 돌아왔습니다. 돈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새마을금고 아동수당 들어오는 통장에서 돈을 뽑아 모텔비 식비를 사용했습니다. 옥천에서 방황하다 집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에 옥천에 있는 부동산을 다 돌아다녔지만, 집은 구하기가 어려웠고,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회봉사를 해야하니 옥천에서 지내고 싶다, 집을 구해줄수 있냐고 물어보았고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집을 구해주시면서 구읍에 있는 회사숙소 월60만원 세탁기 있는 원룸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오전에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력서를 구매하고 이력서를 내러 다니고, 저녁에는 상하차를 하면서 며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정준현 형제를 거기서 만났는데 형제님이 술을 마시면서 재발자로 같이 지내자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술까지 재발하면 답이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술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옥천 읍내에서 청년 일자리 구인광고를 보게되었고, 구인광고에 참석하여 일자리 면접을 보았습니다.



 



여러 기업이 있었지만, 학력을 중요시하는 기업들이기에 제가 들어가기는 어려웠고 행복담기만 학력제한이 없었습니다. 행복담기 영업직으로 지원하게 되었고 그때까지 마음에 1차 면접을 봤을 때 붙었다는 확신이 있었고, 이제 회사에 들어가서 잘 지내면 라파에서도 나를 다시 볼 것이다, 그들이 틀렸고 내가 맞았다. 나는 잘 살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이기고 말겠다는 복수심을 가지고 2차면접까지 기다렸습니다. 2차 면접이 되었을 때 행복담기 전무, 부장이랑 면접을 보았고 조금 있다가 이사장님 왔을 때 제 기대는 좌절되기 시작했습니다. 술 문제가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어떤 문제가 있는건지 말해 달라해서 말해주었고 진실 되게 이야기해줘서 고맙다고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우리는 영업직을 뽑는데 운전면허가 없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야기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11월 달이면 운전면허를 재취득할 수 있다고, 그때까지 내부업무를 익히겠다고 말했으나 우리는 4년제 대학 나온 직원이 많은데 무엇을 보고 박준씨를 4년제 나온 직원들과 동일한 월급을 주겠느냐 그 질문에 저는 할 말이 없었으나 분노로 항변했습니다. 나는 나이가 있고, 경험이 있는 것을 무시못한다고 대학교 나온다고 일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답변하였지만 그저 나를 방어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후 당연히 불합격했고, 그렇게 모든 것이 좌절되자 분노에 휩싸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처한 현실, 중독을 인정하기가 무척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고 5일 동안 영업이 아닌 생산직 근무를 나가다 결국 분노에 휩싸여 편의점에 참깨라면을 사러갔다가 참이슬이 보였고, 결국 사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시게 되었고, 16개월 단주했던 시간은 한순간에 무너져버렸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죄책감,무기력에 빠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제 자신을 보게되었습니다. 그렇게 술에 빠져 경험하지 못했던 장취를 경험하며 깨어났을 때 초림자매한테 연락을 받게 되었고, 목사님께서 상태 좀 보고 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번 만나자고 했을 때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잘난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고, 무력한 내 자신을 보이는 것이 너무 싫었지만 어쩔 수없이 만나자고 이야기를 했고 건이 단이랑 함께 온다는 말에 그때서야 샤워를 했습니다. 그때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금단에 시달려 추위에 벌벌떠는 모습, 수염도 못자르고 더러운 모습, 머리는 새치로 뒤덮여 하얗게 변해져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알코올에 무력해지는 나의 초라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라파에서 지낸 세월이 있어서 초림자매랑 건이,단이를 만났을 때 내가 할 수있는 것은 솔직함이라는 것을 기억했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빠가 술마시고 게임해서 미안해 정말 이런 모습 보여줘서 너무나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같이 저녁을 먹자는 초림자매의 말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속이 너무 아프다라는말뿐이였고 사회봉사 얼마 안남았으니 데릴러올게 라는 말을 남기고 공동체로 향하는 초림자매,건이,단이를 보면서 금단을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문을 잠그고 건전지를빼서 자물쇠가 돌아가지 않게 만들고 홀연히 그 방에 누워서 그저 몸을 떨며 보냈고 이 모습이 내가 알코올이든 게임이든 중독에 무력한 사람인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해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의 사회봉사가 끝나고 초림자매가 병원에 가면 좋겠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제가 가기 싫던 병원이 그저 내가 금단을 이길 수 있는 술과 분리된 장소라는 것을 받아드렸습니다. 청주에있는 예사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제는 과대 자기에 휩싸인 내가 아닌 중독에 무력한 내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살기로 했습니다. 병원생활을 하고 있을 때 AA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Message(간증)시간 때 형식적이지 않은 한 분의 고백으로 나의 게임중독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한 분이 자기는 알코올중독이지만 1단계,2단계,3단계가 인정이 되지 않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술은 먹고 있고 가족들은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술을 AA모임에 나가면 끊을수 있다고 하니 나가봤고 그 자리에서 한 분의 고백을 듣는데 아주 못된사람이라는 생각과 분노가 올라와 모임 후 흠씬 두들겨 패서 합의금을 400백만원을 줬다고 했습니다. 다시 술을 마시다 가족들이 또 다른 AA모임에 나가봐라 했지만 술 마시고 폭행을 반복하는 일상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12단계가 도대체 뭐길래 나에게 자꾸 권할까 하면서 12단계를 거꾸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걸렸던 것은 도덕적 검토, 단점, 등 여러 가지가 있었고, 이 문제를 가지고 생각하다보니 가족들이 떠올랐고 가족사진을 문득보니 가족사진에 나만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아 내가 인생을 술로만 살아왔구나를 느끼게되어서 1단계,2단계,3단계가 받아들여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병실로 돌아와 제 게임중독을 바라봤을 때 1단계2단계3단계가 되지않으니 나도 똑같이 해봐야겠다 했을 때 인격적인검토, 해를 끼친 모든 사람들 명단, 나의 단점, 성격상 결점, 잘못에 대한 정확한 본질, 도덕적 검토 모든 것이 나한테 해당한다는 것을 보고 이게 게임 중독이구나를 받아드리면서 내가 게임에 무력했고, 거짓말을 했으며, 행위로 나의 마음의 감정을 위로 받고,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고, 가정에 신경을쓰지 않고 살았다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중독이 나를 어떻게 속이고 살아왔느지를 느끼게 해주는 AA12단계 였습니다. 그렇게 병원에서 금단과 분리되고 목사님 허락으로 231224일 크리스마스 이브때 공동체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단중독은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목사님의 직면과, 사모님의 직면을 받아드리고 나의 자신이 얼마나 교활하고 교만한 놈이었는지 더 상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이 정도는, 저 정도는 괜찮겠지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이전에 알코올을 무력하고 시인하고 고백했다는 것이 진심이 아닌 깡 단주로 형식적이고 머리로 아는 선에서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사모님께서 상담을 하시다가 공동체에서 알려준 것은 다 알려줬다 여기 있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 나가서 살면서 위기와 기회가 항상 공존한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모산,진벌,덕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집을 구하고 있을 때 덕실마을 이장님께서 빈집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집을 봤을 때 내가 수리해서 가족들이랑 살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구두상으로 집을 계약하고 집을 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재발하고 부모님께서 생활비 지원해주신 것을 차곡차곡 초림자매가 모으고 있었기에 그 돈으로 집수리하는데 쓰자고 하고 하나씩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싱크대를 철거하고, 추위를 견디기 위해 보온재를 시공하고 하나씩 자리잡혀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의 더럽혀져있던 마음을 정리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4월 말에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와 생활적인 부분은 정리가 되었지만 목사님께 말씀드리며 공동체에 들어와 농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고, 그렇게 부모님의 지원 없이 내가 버는 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까지 자리잡혀가면서 6월에 처음으로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농사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지속적으로 시골에서 정착하면서 살 것이고 나의 공간에서 나의 작물을 키워보고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제 마음에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가정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으로서 아내가 남편이 회복하는 시간동안 일을하며 생계를 책임져 주었지만, 회사의 잘못된 행동들이 불편하면서 그만두게 되었고, 아내가 일을 나가지 않으니 불안한 마음에 농사를 시작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 때 할 수 있겠다라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집 옆에 작은 6평정도 텃밭에서 50가지의 작물을 수확하면서 먹어본 경험으로 700평되는 땅에서 들깨와,옥수수를 심어보았습니다. 농사가 처음이라 주변 분들에게 자문도 구해보고, 또 다른 농부님들은 어떻게 농사를 지으시는지 다른 밭을 견학하고 그것을 토대로 나의 밭으로 와서 하나씩 가꾸어 갔습니다. 그 작은 씨앗에서 커가는 작물들을 보면서 현실에서 다시 소속감을 느끼고 내 손으로 해낼 수 있다는 기쁨도 맛보게 되었습니다.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해내는 첫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정적 감정을 다루기 위해 대화도 많이 하지만 영성이 중요하다고 늘 들었기에 나의 밭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려 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요?’ ‘하나님 잘 클지 걱정이 많아요. 하나님도 저 보실 때 그러나요?’ ‘하나님 죄송합니다. 작물을 보면 저도 저렇게 성장하고 싶어요라는 이야기등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때마다 불안했던 내적 자기가 슬며시 자기 확신으로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옥수수를 수확할때쯤 수확시기를 좀 늦게했더니 옥수수가 딱딱해지는 것을 보면서 시기를 잘 잡아야겠다라는 마음을 잡고 들깨는 유심히 봐야겠다 하면서 유심히 보면서 시기를 잡아갔습니다.



이 어려운 타이밍 잡기를 하나님은 내게 세심히 이루고 계셨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탈곡기를 빌려 들깨를 탈곡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선택으로 완주해본 34년동안 살면서 처음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들깨를 통해서 지금 저는 6대 덕목이 나에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주 10만원씩 목사님께서 주시는 돈으로 4명의 가족이 자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농사를 통해서 많은 돈이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과 만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정직하게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감정과 거짓된 삶이 아닌 정직한 삶을 배워나가고 단중독으로 나의 영혼과 몸을 중독에 빼앗기지 않는 순결을 배우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용기로 받아들이면서 나의 무력함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순종을 배우고, 나는 알코올,게임 다중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하며 낮은 자로 살아가는 겸손을 배우며 새로오시는 형제님들을 섬길 줄아는 겸손을 배우며, 중독으로 습득되어있던 조급함을 작물이 커카고 수확할 시기를 기다리며, 나의 욕구를 다스리고 욕망이 되지않도록 다스리는 인내를 배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024년 마무리도 저에게 주신 말씀 빌립보서 49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의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말씀처럼 하루하루를 내가 성실히 행하면서 살아가는 회복자가 아닌 늘 회복 중인 다중중독자 박준이 되겠습니다. 그간의 시간동안 저를 지켜보시며 힘드셨을텐데 너무나 죄송하고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목록으로

댓글 0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