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5일 일요예배말씀나눔

라파공동체2026.03.28 15:232


  1. 105일 일요일 예배




  • 로마서 7-8장을 중심으로 -


    1. 로마서의 기본 이해와 집필 배경





목사님은 말씀나눔을 시작하며 로마서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관점을 제시하셨습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바울이 보낸 편지이며, 우리는 이 편지가 왜 쓰였는지를 먼저 이해한 후에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로마 교회가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다른 교회들에서는 몇 달에서 2-3년씩 머물며 교리를 설명할 수 있었지만,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는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신학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전달한 일종의 교리서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고 설명하셨습니다.



 






    1. 율법 문제의 핵심





목사님은 바울이 로마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율법에 관해 강조하고 있다고 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나 할례와 같은 형식적인 것들은 나름대로 잘 지키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진정한 정신, 즉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로마의 유대인들은 이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형식에 매이다 보니 더 중요한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놓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기독교인들의 핵심 문제가 율법 위에 예수님을 올려놓은 것이라고 분석하셨습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율법 없이 예수님을 직접 만났는데, 유대교 기독교인들은 자꾸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며 핍박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서를 썼으며, 율법을 자꾸 강요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갈등은 야고보 사도와의 논쟁으로까지 이어질 정도로 초대교회의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1.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전환





목사님은 로마서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되는 역사적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유대교인으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기독교인으로 생각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들이 유대교인이라는 의식이 훨씬 더 강했을 것이라고 보셨습니다. 당시에는 신약 성경이 없었고 구약 성경만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구약을 믿는 유대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예수를 믿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중독자의 비유를 들어 이 상황을 설명하셨습니다. 중독자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체험했다고 해서 한 번에 온전한 크리스천이 될 수 없듯이, 유대인들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수십 년간 유대교에서 배운 것들이 한 방에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이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당시 상황은 구약 성경으로 예수를 해석해야 했고, 새롭게 구약을 해석한 기독교가 탄생하고 있었지만 오랜 전통과 생각을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1. 선민의식의 문제





목사님은 "우리는 선민이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로마서의 핵심이라고 보셨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대비되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나 탈무드 같은 복잡한 종교적 전통이 없었고, 오직 순수한 믿음만 있었습니다.



또한 탈무드와 율법 연구에 평생을 바치는 이스라엘의 정통 유대인들을 언급하시며, 율법 해석의 치밀함과 복잡성을 설명하셨습니다. 이들은 일도 하지 않고 매일 성경과 탈무드를 공부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입니다. 반면 바울은 선교할 때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이 오히려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진짜 기독교인이며,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섞인 혼란이 없고 순수하고 담백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를 받아들이기란 유대인들에게 극도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수천 년의 전통과 역사를 가진 자신들과 이방인들이 똑같다거나, 오히려 이방인들이 더 정통이라는 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들의 사회경제적 배경도 언급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시대에도 고리대금업을 했으며, 구약에서는 동족끼리는 이자를 받지 않았지만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았습니다. 만약 이방인 기독교인을 같은 기독교인으로 인정하면 영적으로 동족이 되므로 이자를 받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돈벌이 대상이 없어지는 문제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선민의식을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양반과 평민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갑오개혁 때 신분제도가 없어졌을 때, 양반들이 머슴이 의병 대장이 되고 자신과 같이 국사를 논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처럼,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만큼 거부감이 심했을 것입니다.



 






    1. 은혜의 본질





목사님은 은혜를 율법과 대비되는 핵심 개념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구원이란 예수를 아는 것과 믿게 된 것이며, 이것이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정리하셨습니다. 은혜란 자신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서 알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를 통해 예수를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이 저 먼 나라의 누군가를 믿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것이 은혜로 된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도 사실은 은혜로 알게 된 것인데, 자신들은 역사적 전통과 율법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순수한 은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들은 이방인들도 자신들이 거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은 은혜는 공짜로 얻은 선물이기 때문에 선민일 이유도 없고, 잘난 척할 것도 없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공짜로 얻었기 때문에 자유하고 차별이 없고, 모두가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죄인인데 하나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에 형제자매가 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우리는 이것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열심히 했는데 너희는 공짜로 받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다른 교회를 예로 들며, 은혜를 받고 나서 바로 선민이 되어 "우리만 은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사실 은혜는 죄인들에게나 선인들에게나 악인들에게나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물이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는 순간 자기만 받았다고 주장하면 그 사람은 선민이 되고, 그것이 또 다른 죄가 됩니다.



 






    1. 개인적 나눔과 적용





러시아에서 온 이아 자매는 교회를 다니다 보면 유대인 바리새인처럼 되는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겉으로 규칙들을 지키니까 자신이 완벽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자기를 위해 시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없이는 율법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하며,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병자를 위해 왔다"고 하셨는데 교회를 다니면서 자신이 이제 병자가 아니라 건강하다고 자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겉만 깨끗한 양파 같은 존재이고, 계속 까도 또 나오는 것처럼 죽을 때까지 계속 고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근용 형제는 이전 교회에서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의인"을 강조하며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로마서를 많이 공부하면서 "의인"이라는 문구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것으로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의인이 아닌 것 같았고, 왜 자꾸 의인이라고 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곳에서 말하는 구원은 예수님 때문에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며, 죄인이라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근용 형제는 한동안 죄에서 벗어나 의인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실제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만약 공동체에 오지 않았다면 다시 그곳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동체에서 항상 자신이 죄인의 자리를 떠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율법적인 사람으로 보았는데, 너무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으며 틀 안에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율법도 전혀 와닿지 않았고, 죽어도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교만한 것인지, 아니면 과거 율법 속에 갇혀 예수님의 현실 속에서 살지 못하는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목사님은 간단하게 "그냥 살아가면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여전히 회사 생활을 하면서 율법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7-8장은 너무 어려웠지만, 공부하면서 과거에 율법으로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율법이 아닌 자유의 세계, 선민의식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1. "이미 그러나 아직"의 신학





목사님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 개념인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틀로 이 문제를 정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의인이지만, 여전히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죄인입니다. 의인과 죄인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신학적 틀입니다.



즉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의로움을 알게 되었지만 충분히 의로운 사람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완성되어 나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과정의 종교입니다. 성숙하고 성장하며 완성을 향해 가다가 죽게 됩니다. 아무도 살아서 완성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모든 신학적 지식은 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은혜 안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고, 율법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긴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기독교는 항상 균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공회가 중시하는 사상이며, 공자의 중용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인과 죄인의 균형, 은혜와 책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1. 현대 기독교에 대한 비판





목사님은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거의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같다고 비판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마치 자기가 무슨 대단한 존재인 줄 알고, 구원받았고 천국 갈 것이라며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전도 대상을 불쌍한 사람들로 보는 의식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이러한 선민의식과 자기 우월감은 다른 종교들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적 태도로 나타납니다.



선민의식의 거부감이 얼마나 심했을지를 우리나라 역사에 비유하셨습니다. 갑오개혁 때 신분제도가 없어지면서 양반들이 머슴과 함께 국사를 논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처럼, 유대인이 이방인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 정도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굉장히 불쌍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성은 없어지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계속 간다고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자본주의와 연결시켜 설명하셨는데, 자본주의가 신성을 가지고 있으며, 빚이 없어지지 않고 죽은 사람의 빚이 자식들에게 물려가는 것처럼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하비 콕스가 "자본주의는 왜 신이 되었는가"에서 자본주의가 영생한다고 말했듯이, 기업들은 사장이 바뀌어도 회사는 남아 영생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1. 역사적 결과와 교훈





목사님은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리하셨습니다.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더 정통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일부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점점 더 유대교로 돌아갔고, 기독교는 이방인들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로마로 들어간 후 초대 교회의 12사도가 죽은 다음 속사도 시대가 왔는데, 이레니우스, 폴리캅과 같은 이들은 모두 이방인이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이름 자체가 이방인 신학자, 이방인 사도들의 이름입니다. 안토니우스, 어거스틴, 터툴리안 등 탁월한 신학자들이 전부 이방인들 중에서 나왔고, 유대인 기독교 지도자는 12사도 이후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성향과 경계가 오늘날 우리 안에도 많이 남아 있는 잔재일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로마서 7-8장은 이러한 전환기의 어려움과 갈등, 그리고 바울의 신학적 해결책을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1. 핵심 통찰





이번 예배를 통해 확인한 핵심 통찰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로마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되는 역사적 순간을 보여주는 문서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이 더 이상 율법과 전통에 기반한 선민이 아니라, 순전한 은혜로 구원받은 기독교인임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둘째, 선민의식은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의 전통과 특권을 내려놓고 이방인들과 동등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자신들의 우월감과 특권의식을 내려놓기 어려워합니다.



셋째, 은혜는 공짜 선물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자랑할 것도, 차별할 이유도 없습니다. 은혜를 진정으로 이해하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우월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넷째, "이미 그러나 아직"의 긴장 속에서 사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인이지만 아직 죄인이고,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이미 은혜 안에 있지만 아직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다섯째, 기독교는 과정의 종교입니다. 완성을 향해 가되 죽을 때까지 완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겸손하게, 그러나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여섯째, 순수하고 담백한 믿음이 가장 정통입니다. 복잡한 종교적 전통이나 지식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단순한 믿음이 더 본질적입니다.



일곱째, 교회는 선민의식을 심어주는 곳이 아니라 죄인임을 자각하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특별하다"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들"이라는 메시지가 더 성경적입니다.



이러한 통찰들은 단순히 역사적 지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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